늦가을 궂은비 맞으며
출판사에 장편 소설 원고 넘기려고 추고하다가 물통을 지고 북한산 중턱 약수터에 오릅니다
떨어져 누운 채 젖은 낙엽 밟으면서
좋은 물 마시고 오래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이 지친 육신
빌어먹을
이놈의 소설 쓰기 슬프고 겁납니다
돼지 똥오줌 냄새 저쪽 눈송이들 같은 개망초꽃
눈물 같은 이슬 질퍽한 그 꽃술 언덕 위에
누워 있는 당신의 지청구가 들립니다
너 이 새끼 위조지폐 좀 작작 그려라
옥천을 따라 걷습니다. 남문교 성남교 성동교 조곡교 내가 아침에 만나는 다리 이름입니다. 다리들은 매일 한자리에 서서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요. 사람들과 자동차들 수없이 지나가지만 아무 불평 없습니다. 강물 위에 의젓이 서 있는 다리들이 고맙고 사랑스럽습니다. 지나간 시절 그립습니다. 조간에 매일 시가 발표되고 월평란에 그달의 시와 소설이 소개되었지요. 문단 어른들이 쓴 이 월평을 읽으며 새로운 작가의 꿈을 꾸는 이 많았습니다. 너 이 새끼 위조지폐 좀 작작 그려라. 평론가 김현이 한승원의 소설에 던진 지청구입니다. 가슴 저릿저릿한, 사랑 가득한 지청구이지요. 좋은 작품도, 꾸중해 줄 어른도 없는 아침입니다. 가을 햇살 아래 다리들 환합니다.
곽재구 시인
2021-10-08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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