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열
열쇠 꾸러미를 너에게 준다
어느 방 여느 서랍이나 금고도
원하거든 열거라
그러하고
무엇이나 가져도 된다
가진 후 빈 그릇에
허공 부스러기를 좀 담아 두려거든
그렇게 하여라
이 세상에선
누군가 주는 이 있고
누군가 받는 이도 있다
받아선 내버리거나
서서히 시들게도 하는
이런 일 허망이라 한다
허망은 삶의 예삿일이며
이를테면 사람의 식량이다
나는 너를
허망의 짝으로 선택했다
너를
사랑한다
봄 강물에 물고기들 따뜻이 헤엄친다. 한 달 전에 비해 살이 토실토실 올랐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청둥오리 두 분이 있다. 두 분은 강물 가운데 나란히 솟은 두 개의 삿갓바위 위에 각기 자리를 잡고 있다. 왜 돌아가지 않지? 나처럼 여기 주저앉아 살기로 한 것일까? 그 이유를 알게 됐다. 한 분은 가끔 날아오르나 한 분은 제자리에 앉아 있다. 이 일이 며칠째 지속된다. 한 분이 물고기 한 마리를 건네 주자 한 분이 급히 먹는다. 부상당한 동무를 놔두고 돌아갈 수 없어 함께 머문 것이다. 허망이 사랑의 일란성 쌍둥이라는 것을 시는 이야기한다. 허망할 수 있으므로 자유롭고 허망할 수 있으므로 너를 사랑한다. 이 선언 따뜻하다.
곽재구 시인
2021-05-07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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