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엽이 돌아가며 인형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은밀한 회상 속으로 나는 끌려 들어갔다
바이올린은 높은 도에서 온종일 떨었고
흰 머리칼 휘날리며 빨간 눈을 치켜뜨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두근두근
저주해 사랑해 저주해
끝없음과 끝없음이 지상을 스쳐 잠시 만날 때
빛이 끌어내는 색깔의 형식으로 신음하는 사물들
어둠 속에 뿌리 내린 식물들의 신성한 마비와
심연 위에 펼쳐지는 미로의 얼굴 얼굴들
우리는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법은 알지만
그 끝이 무언지 결코 모르지 않던가?
시를 읽으면 앉은뱅이 벌떡 일어나고
시를 읽으면 광인이 맑은 눈빛으로 엉엉 울고
시를 읽으면 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나, 일곱 원소로 분해되어 이렇게
당신 눈꺼풀에 매달려 있는데…
세바스토폴에 가고 싶은 적 있었다. 2차 대전 최고의 격전지.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처럼 삶이 한없이 가벼울 때 그곳 거리를 두 발로 걷고 싶었다. 살고 싶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사랑한다는 고상함은 또 무엇인지? 저물녘의 눈꺼풀에 매달린 한 방울의 눈물 그 안의 작은 무지개를 꺼내고 싶었다.
곽재구 시인
2021-04-23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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