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그치자
녹천역 근처 중랑천 둔치에 할멈이 나와 계시다
열무밭에 쪼그려 앉아 꿈쩍도 안 하신다
밤에 빨아놓은 교복이 마르지 않아
젖은 옷을 다림질할 때처럼
가슴속에 빈 쌀독을 넣고 다닐 때처럼
젖은 마당에 찍어놓고 새벽에 떠난 딸의 발자국처럼 앉아 계시다
비 그치면
노을에 묶인 말장처럼
열무밭에 앉은 왜가리
기억이 묻은 마음 때문에
물속만 가만히 내려다보고 계신다
왜가리는 대표적인 여름 철새다. 일부는 월동을 하면서 텃새로 바뀌었다. 여름 번식기 때 왜가리 부리는 주황색을 띤다. 주로 강가, 해안, 개펄, 도심 하천의 수중보 따위에서 물고기나 개구리 등을 가리지 않고 잡아먹는다. 비 그친 중랑천 둔치 열무밭에 앉아 꿈쩍도 않는 할멈이 있고, 열무밭에 앉은 왜가리도 있다. 둘은 “가슴속에 빈 쌀독을 넣고” 다니는 같은 사연을 품은 부류다. 왜가리는 먹고사는 일의 시름을 잊은 듯 시종 꼿꼿한 자태다. 실은 먹잇감을 기다리는 것! 저것은 생존을 위해 고투하는 자가 보여 주는 일반적인 풍경이다.
장석주 시인
2017-08-05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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