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대] 무언가 서글픈, 러시아의 ‘승리의날’/임명묵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4학년

[2030 세대] 무언가 서글픈, 러시아의 ‘승리의날’/임명묵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4학년

입력 2019-05-09 17:10
수정 2019-05-10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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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묵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4학년
임명묵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4학년
러시아에서 5월 9일은 ‘대조국전쟁’이라고 부르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일이다. 이 날은 현대 러시아에서 가장 성대하게 치러지는 기념일로, 러시아 각지에서 각종 군사 퍼레이드와 기념 콘서트가 열린다. 이런 축제에서 러시아인들은 과거 부모와 조부모가 치렀던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전쟁의 기억을 되새긴다. 먼저 규모만 봐도 이 전쟁은 특별했다. 소련 전역에서 2700만명이 죽었고, 가족을 잃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거기에 멸망 직전까지 몰린 나라가 의지를 다잡아 침략자를 격퇴한다는 서사도 신화적이었다. 그런 이유로 전쟁은 종전 후 70년 동안 대중문화의 가장 중요한 소재 중 하나였다.

올해 2월 시베리아횡단철도를 따라 러시아를 둘러보며 현대 러시아에서 전쟁을 어떤 식으로 기억하는지 좀더 들여다볼 수 있었다. 먼저 전쟁의 기억은 이 사람들에게 단순히 신화 수준을 넘어서 일상의 영역이라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방문한 모든 주요 도시에는 전몰자를 기리며 늘 타오르는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추모 공원을 볼 수 있다. 도시 중심가에는 참전용사를 기린 동상들과 전쟁 때 활약한 T-34 전차가 전시되어 있다. 시베리아의 대도시 노보시비르스크를 방문한 2월 23일은 마침 러시아의 국군의날인 ‘조국 수호의날’이었는데, 이 날 전몰자 추모 공원에 가서 본 풍경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자아냈다. 부모를 따라온 아이들이 전시된 전차와 대포 위에서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고, 이제 막 걸음을 시작한 꼬마 아이들도 나뭇가지를 총 대신 붙잡고 러시아 군인들의 칼같이 각잡힌 행군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었다.

외부자의 무례한 시선일 수도 있겠지만, 이쯤 되니 무언가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러시아에서 이제 전쟁을 직접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승리의날은 막상 전쟁을 치렀던 소련 시절보다 오늘날에 더 성대하게 기념된다. 아마 승리의 기억이 현대 러시아인들에게 결핍된 무언가를 채워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 러시아에 남은 것은 해체된 제국과 파괴된 사회, 불신이지만 전쟁의 영웅적 기억은 한때 러시아가 베를린에서 평양까지 이르는 지역을 해방했다는 사실과 전 인민이 일치단결해 침략자를 몰아내는 단결과 사회적 유대를 떠올리게 해준다.

문제는 이것이 아무리 영광된 기억일지라도, 기억은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줄어드는 인구, 천연자원 의존 경제, 미래 리더십 부재를 생각했을 때 러시아의 미래는 결코 밝다고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은 조상의 승리를 추억하며 자신들 국가에 산적한 문제를 잠시간 잊는 것만 같았다. 마치 잠깐 고통을 잊게 해주는 진통제처럼. 그런 점에서 나는 승리의날에 기묘한 애석함을 느낀다. 지구의 반을 돌아 추축국(Axis-Powers)을 물리치고 우주에 사람을 최초로 쏘아올렸던 이 위대한 국가는 어째서 패전국보다 못 살게 된 것일까.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2019-05-1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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