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황한 ‘이재명 영장기각’ 결정문
검찰과 여권 눈치 본 건 아닌지
사법의 정치화는 민주체제 재앙
정치로부터 법관 독립 지켜 내야
진경호 논설실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앞에 두고 앉은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 유창훈의 ‘고독’을 생각해 본다. ‘피의자 이재명’을 구속하느냐 마느냐, 이 단순하고 복잡한 ‘○× 문제’를 놓고 검찰은 무려 1600쪽, 변호인단은 300쪽의 ‘예문’을 제시했다. 2년에 걸친 방대한 수사와 1년여의 치열한 ‘방탄’이 실핏줄까지 드러낸 자료들이다. 체포동의안 처리를 두고 정치판이 뒤집어진 사안이다. 이 그악스러운 ‘압박’ 앞에 홀로 선 유창훈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기각 결정은 언제 했을까. 검찰과 변호인단 주장을 듣고 나서? 아니면 영장심사도 하기 전에 이미? 결정 이후의 정치적 파장은 상상하지 않았을까?
부질없는 질문이다. 버스는 떠났다. 그러나 그의 장황한 기각 결정문은 발길을 돌리기 어렵게 만든다. 무려 892자(字)라니, 길게 쓴 이유가 뭘까. 아주 길었다는 박근혜 전 대통령 구속 결정문이 200자가 채 안 된다. 대개의 영장 처분은 20자 안쪽이 고작이다. 내 결정이 합당한 것임을 ‘모두’가, 특히 이재명 구속을 염원했던 검찰과 여권이 알아 달라는 것 말고 딱히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기각 논지는 더욱 이해 불능이다. 위증교사 혐의가 소명된다면서 증거인멸 가능성이 없다는 그의 주장은 형용모순의 ‘검은 백마’처럼 들린다. ‘정당의 현직 대표로서 공적 감시와 비판의 대상인 점’이 증거인멸 가능성을 배척한다는 지적은 국회를 방탄 보루로 만든 정치 권력의 막강한 힘은 차마 바로 보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읽힌다. 기각 결정문의 요체는 그래서 그저 ‘내 마음 가는 대로’로 비친다.
유창훈 개인의 정치 성향이 어떠한지는 사법의 앞날을 살피는 데 있어서 아주 작은 일이다. 문제는 연중무휴의 방탄 국회와 때아닌 단식 투쟁, 체포안 가결표 색출이라는 파시즘이 뒤엉킨 난장의 정치 상황이 일개 판사의 자의적 판단에 휘둘려도 좋을 만큼의 합당한 공정성과 신뢰를 지금 사법부가 지니고 있느냐는 점이다. 지난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에서 민낯을 드러낸 법관들의 정치 편향, 조국·윤미향·최강욱 등에 대한 재판 지연이나 권순일 전 대법관의 ‘대장동 사업 재판 거래 의혹’ 등은 사법의 타락을 여실히 보여 준다. 지난 3월 영국의 싱크탱크 레가툼의 조사에서 한국의 사법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167개국 가운데 155위에 머물렀다는 소식을 굳이 되새길 것도 없이 ‘디케의 저울’이 어쩌고 사법 정의가 저쩌고 하는 고담준론은 그저 다 ‘개소리’일 뿐인 나라가 된 것이다.
유창훈의 이재명 구속영장 기각을 계기로 영장항고제 도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힘을 받고 있다. 구속영장 기각에 맞서 검찰이 상급법원에 영장을 재청구할 길을 열어 놔야 한다는 것이다. 주요 사건만이라도 복수의 판사로 구성되는 합의부가 영장심사를 맡도록 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할 때 영장전담판사 당직 순번부터 살피는 게 당연한 일이 된 마당에 마다할 이유가 없는 주장들이다.
그러나 정치적 공방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정치의 사법화’와 판사의 정치 성향이 재판을 지배하는 ‘사법의 정치화’가 속도 경쟁에 나선 재앙적 상황이라면 고민의 테두리는 훨씬 더 넓어져야 한다. 정치의 사법화가 민주체제를 병들게 한다면, 사법의 정치화는 민주체제의 종말을 뜻한다. 판사 자리에 인공지능(AI)을 세워 놓거나 차라리 주사위를 갖다 놓으라는 비아냥이 커져 간다. 판사를 정치적 압박로부터 해방시킬, 정치적 유혹으로부터 독립시킬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2023-10-04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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