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비상계엄 선포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일 밤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긴급 대국민 특별 담화를 하고 있다. 2024.12.3
대통령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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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은 국민을 향한 뜨거운 충정을 믿어 달라며 그토록 존경한다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을 따라 ‘비상계엄 대통령’이 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최초의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1952년 9월 부산 정치 파동 당시에는 초대 대통령 임기 만료를 앞두고 의회와 불화를 겪다 재선을 위해 대통령 선출 방식을 간접선거에서 직접선거로 바꾸려 계엄령을 선포하고 야당 의원을 체포해 장기 집권의 기반을 마련했다. 1960년에는 4·19 혁명을 막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승만 정권의 비상계엄 선포는 주로 정권 유지와 헌정 질서 유린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집권 기간 네 차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1961년 5월 5·16 군사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잡은 후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1964년 한일 수교 반대 시위인 6·3 항쟁을 억압하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1972년 10월에는 유신헌법 선포와 함께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1979년 10월 부마 민주항쟁을 억압하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박정희 정권의 비상계엄은 주로 시민 저항을 막거나 정권 연장을 위해 활용됐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10·26 사건 이후 선포된 비상계엄을 1980년 5월 17일 전국으로 확대했다. 비상계엄 확대와 함께 정치활동 금지, 대학교 휴교령, 언론보도 사전검열 강화, 집회 및 시위 금지 등의 조치가 내려졌다. 이 조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주요 원인이 됐다. 전국 비상계엄은 1981년 1월 24일까지 유지됐다. 전두환 정권의 비상계엄은 군부의 정권 장악과 민주화 요구 억압을 위해 사용됐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소추안 재표결이 가결된 14일 국회에서 시민들이 환호를 하고 있다. 2024.12.14 홍윤기 기자
비상계엄 선포는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악용됐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계엄 발동 요건과 사후 통제가 크게 강화됐다. 윤 대통령은 계엄 발동 요건과 사후 통제 절차를 무시한 ‘12·3 비상계엄 사태’를 일으켰다. 정치적 무능을 넘어 최소한의 법률가적 판단력마저 상실한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에 관한 판단은 국민 마음속에 이미 이뤄졌다. 이제 와 무례하게도 대통령에게 어린아이 타이르듯 두루뭉술한 사과의 구체적 요소를 가르쳐 준 어떤 언론인처럼 계엄의 한국사적 의의와 이후 강화된 요건, 시민의 일상을 파괴하는 효과까지 전할 요량이 내겐 없다.
혹자는 삼권이 분립돼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지만 모든 권력의 원천인 국민은 입법·사법·행정을 한데 모아 평가한다. 헌법정신과 법치주의를 운운하지만 국민의 직접 동의를 얻어 만든 헌법이나 대의민주주의로 만든 법률이나 국민 마음속에선 매한가지다. 형사사법의 무죄추정 원칙과 헌법상 대통령의 비상대권을 논하지만 국민 마음속 원칙은 단 하나다. 국민의 뜻을 거스르지 말라는 것이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새삼 느낀다. 시민의 일상을 파괴한 죄과는 그 자체로 크다. 그러니 피소추인 윤석열을 국민의 뜻에 따라 파면하라. 일상의 평온은 국민이 다시 지킬 것이다.
강윤혁 정치부 기자
강윤혁 정치부 기자
2024-12-23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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