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품은 우리 동네] 홍예문은

[길을 품은 우리 동네] 홍예문은

입력 2012-07-25 00:00
수정 2012-07-25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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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봉산 마루턱 깎은 터널형 돌문 남북·동서 잇는 통로

홍예문(虹霓門·무지개문)은 인천 구도심의 남산 격인 응봉산 마루턱을 깎아서 길을 내고 그 정점에 세운 무지개 모양의 동그란 돌문이다. 중구 홍예문 1길과 2길이 만나는 해발 65m의 고개에 서 있다. 산 마루턱을 파내 길을 내고 50㎝ 정도의 직육면체 화강암들을 쌓아서 폭 4.5m, 높이 13m, 통과 길이 8.9m로 만든 터널형이다. 마루턱을 깎은 뒤 문 양측에 축대를 쌓았다. 마름모꼴로 쌓아놓은 일본식 석축은 건설 당시 그대로의 견고함을 자랑한다. 무지재 돌문 또는 무지개 수레문의 뜻으로 한자로는 ‘홍여문’(虹礖門), ‘홍여문’(虹轝門)으로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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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학생이 100여년이 넘은 유서 깊은 홍예문길을 따라 이야기를 나누며 동인천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 양편에 마름모꼴로 쌓아 올린 일본식 석축이 시대의 변화를 견뎌내고 있었다(왼쪽). 1908년 응봉산 남쪽 마루턱을 깎아 건설한 당시 홍예문과 홍예문길의 모습이 최근의 것인 듯 선명하다. 인천역사박물관 소장자료다.
두 여학생이 100여년이 넘은 유서 깊은 홍예문길을 따라 이야기를 나누며 동인천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 양편에 마름모꼴로 쌓아 올린 일본식 석축이 시대의 변화를 견뎌내고 있었다(왼쪽). 1908년 응봉산 남쪽 마루턱을 깎아 건설한 당시 홍예문과 홍예문길의 모습이 최근의 것인 듯 선명하다. 인천역사박물관 소장자료다.
일본인들은 ‘아나몽’(穴門)이라 불렀다. 1905년 일본 공병대가 착공해 3년 만인 1908년 완성됐다. 중국인 석공들과 한국인 노동자들이 동원됐고, 암반층으로 인명피해 등 희생을 치렀다고 인천향토사료 등 기록들은 전한다. 건설비 3만 2250원 가운데 한국정부가 1만 6800원, 일본거류민단이 1만 5000원, 일본영사관 격인 인천이사청이 450원을 낸 것으로 기록돼 있다.

홍예문은 일본인들의 유입이 가파르게 늘고 인천항 부근의 조계지가 포화 상태가 되면서 일본인들이 모여 살게 된 만석동 등 주요 배후 지역과 인천항 조계지를 연결시키기 위한 연결 통로로 건설됐다. 일본 공병대가 건설을 맡을 정도로 인천과 조선에서 일확천금을 꿈꾸던 일본인들과 식민지 건설에 박차를 가하던 일본에 중요하고 특별한 공사였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49호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2012-07-25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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