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다큐&뷰] 점점… 손끝으로 더 넓은 세상 보고 싶습니다

[포토 다큐&뷰] 점점… 손끝으로 더 넓은 세상 보고 싶습니다

손형준 기자
입력 2017-12-24 17:32
수정 2017-12-25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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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29만명 추산… 여전히 부족한 생활 속 점자 표기

인천 남구 학익동에 있는 인천시각장애인복지관의 한 강의실에서 책 읽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문을 열어 보니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의 수강생들이 눈이 아닌 손가락으로 책을 더듬으며 볼록한 점 형태의 문자인 점자를 배우고 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문자인 점자는 세로 셋, 가로 둘, 총 여섯 개의 점을 조합해 글자를 표시한다.
시각장애인인 안숙자(45)씨가 볼록 솟은 점들을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더듬어가며 점자로 번역된 소설책을 읽고 있다.
시각장애인인 안숙자(45)씨가 볼록 솟은 점들을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더듬어가며 점자로 번역된 소설책을 읽고 있다.
●6개월 학습자가 윤동주 ‘서시’ 한 편 읽는데 약 15분 소요·속독엔 3년 걸려

현재 보건복지부에 등록된 우리나라 시각장애인은 25만 3000명으로 등록하지 않은 사람까지 합하면 29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각장애는 보이지 않는 정도에 따라 1~6등급으로 나뉜다. 이 중 전혀 볼 수 없는 전맹과 이에 가까운 1~4등급의 중증 시각장애인이 글을 읽으려면 점자를 배워야 한다. 시각장애인이 점자를 모르는 것은 일반인이 글을 모르는 문맹 상태와 같다. 군에서 사고로 시력을 잃은 진종일(76) 씨는 “30대 후반에 점자를 배운 덕에 그간 점자로 번역된 교양잡지나 인문학 책 등을 읽으며 다양한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보통 6개월이면 점자를 익힐 수 있지만, 단편소설이나 시 등을 읽을 수 있는 정도의 속독이 가능해지려면 3년 정도 꾸준히 익혀야 한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 한 편을 기준으로 6개월 학습자는 15~20분, 3년 학습자는 2~3분이 소요된다.
인천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시각장애인들이 점자 정보 단말기를 이용해 점자를 읽는 연습을 하고 있다.
인천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시각장애인들이 점자 정보 단말기를 이용해 점자를 읽는 연습을 하고 있다.
인천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한 점역사가 시각장애인 어린이도 동화책을 읽을 수 있도록 책의 내용을 점자로 옮겨 만든 투명한 시트지 형태의 점자판을 책장마다 붙이고 있다.
인천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한 점역사가 시각장애인 어린이도 동화책을 읽을 수 있도록 책의 내용을 점자로 옮겨 만든 투명한 시트지 형태의 점자판을 책장마다 붙이고 있다.
인천시 남구 학익동 송암점자도서관 전시실을 찾은 관람객이 나라별 점자 표기 예를 살펴보고 있다.
인천시 남구 학익동 송암점자도서관 전시실을 찾은 관람객이 나라별 점자 표기 예를 살펴보고 있다.
●표지 훼손·손상·터치패드 등 불편해… “점자 배울 필요성 못 느껴” 외면

모든 시각장애인이 점자를 아는 것은 아니다. 어릴 적부터 맹학교에 다니며 점자를 필수로 배운 선천적 시각장애인들과 달리 질병이나 사고 등 후천적 요인으로 장애를 갖게 된 중도 시각장애인들은 점자 문맹 비율이 높은 편이다. 컴퓨터 화면 속의 글자들을 음성으로 읽어주는 프로그램이나 오디오북 등 청각적으로 점자를 대신하는 기술이 발전한 이유도 있지만, 촉각에 의지해 점자를 배우는 일이 쉽지 않은 탓이 크다. 일반인이 영어가 아닌 태국어, 러시아어 등 낯선 제3의 외국어를 배우는 것 이상으로 어려워 점자를 배우다 중도 포기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점자를 외면하는 더 큰 이유는 다른 데 있다. 한 시각장애인은 “실생활에서 쓰임새가 적은 탓에 점자를 배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밝혔다. 시각장애인이자 인천시각장애인복지관 직원인 전영훈(34) 씨도 “필요한 곳에 점자가 없는 상황이 많고, 있어도 잘못 표기되거나 손상돼 읽기 어려운 곳이 많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서울 시내 한 상업빌딩 엘리베이터 버튼에 점자 표기가 돼 있다(왼쪽). 반면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 버튼에는 점자 표기가 보이지 않는다.
서울 시내 한 상업빌딩 엘리베이터 버튼에 점자 표기가 돼 있다(왼쪽). 반면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 버튼에는 점자 표기가 보이지 않는다.
서울 시내 한 편의점에서 장바구니에 담아든 6종의 음료수 캔 모두 윗 부분에 ‘음료’라는 점자 표기가 돼 있다. 이 중 어떤 것이 콜라인지, 과일주스인지, 커피인지 구분할 수 있을까?
서울 시내 한 편의점에서 장바구니에 담아든 6종의 음료수 캔 모두 윗 부분에 ‘음료’라는 점자 표기가 돼 있다. 이 중 어떤 것이 콜라인지, 과일주스인지, 커피인지 구분할 수 있을까?
시각장애인인 정종민(53) 씨가 집안에 있는 보일러의 온도조절 버튼을 확인하고 있다. 점자 표기가 없는 보일러의 온도를 조절하는 일은 생활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애로사항 중 하나다.
시각장애인인 정종민(53) 씨가 집안에 있는 보일러의 온도조절 버튼을 확인하고 있다. 점자 표기가 없는 보일러의 온도를 조절하는 일은 생활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애로사항 중 하나다.
지하철 1호선 시청역 스크린도어에 승강장 번호와 행선지 방향이 적힌 점자 표지가 붙어 있다.
지하철 1호선 시청역 스크린도어에 승강장 번호와 행선지 방향이 적힌 점자 표지가 붙어 있다.
시각장애인인 안숙자(45)씨가 인천시 남구 연수동 자택에서 상비약 제품 포장 위에 약품 종류를 점자로 번역해 직접 붙인 모텍스(빨간 원안의 점자 스티커)를 만지며 복용할 약을 찾고 있다.
시각장애인인 안숙자(45)씨가 인천시 남구 연수동 자택에서 상비약 제품 포장 위에 약품 종류를 점자로 번역해 직접 붙인 모텍스(빨간 원안의 점자 스티커)를 만지며 복용할 약을 찾고 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환경 조성돼야 시각장애인의 삶 더 행복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면 지하철역의 스크린 도어나 건물 안 엘리베이터, 음료수캔 등 다양한 곳에서 점자 표기를 발견할 수 있다. 시각장애인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점자 표지가 훼손됐거나 다른 위치에 붙어 있는 일이 많다. 특히 엘리베이터에 점자 표기가 없거나 비슷한 모양의 상하 버튼, 3과 6 버튼의 점자 표기가 바뀐 상황이 종종 있어 시각장애인을 당황케 한다. 100% 가깝게 점자가 새겨진 캔음료도 모두 ‘음료’라고만 표기돼 있어 콜라인지 커피인지 종류를 구분할 수 없다. 가전제품도 점자 표기가 힘든 터치패드 방식이 많아 시각장애인이 사용하기 어렵다.

의약품도 전문약과 일반약의 점자 표시 비율이 0.1%와 0.3%에 불과하다. 점자 스티커인 모텍스 등을 이용해 시각장애인 스스로 표기를 하지 않는 한 여러 약을 한곳에 보관할 때 약물 오용의 위험을 피하기 어렵다. 다행히 지난달 공정거래위원회가 의약품 점자 표시 의무화를 담은 개선안을 만들어 식품의약품안전처에 권고했지만, 제약업체가 이를 모든 의약품에 적용할지는 알 수 없다.

시각장애인복지관 등 점자 학습 시설이 전국적으로 적지 않지만, 점자 사용의 기회가 늘지 않는 한 점자 문맹률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사회 전반에 걸쳐 점자 표기가 늘어난다면 점자를 배우는 시각장애인의 수는 자연히 늘어날 터다. 작은 부분이라도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시각장애인의 삶은 지금보다 좀 더 편하고 행복해 질 것이다.

글 사진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2017-12-2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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