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렬과 함께하는 건축 시간여행] <4> 전남 여수 애양원
800여명 나환자 밤에만 걸어 140㎞ 이동… 눈물로 지은 공동체수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켜켜이 쌓은 가치… 그 가치 담은 공간
![여수 애양원 여자 환자 숙소를 펜션으로 새롭게 복원한 ‘치유의 숲’(김봉렬 작). 옛 환자들의 숙소동이 현재 펜션의 마당이 됐다.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https://img.seoul.co.kr/img/upload/2019/04/15/SSI_20190415180236_O2.jpg)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여수 애양원 여자 환자 숙소를 펜션으로 새롭게 복원한 ‘치유의 숲’(김봉렬 작). 옛 환자들의 숙소동이 현재 펜션의 마당이 됐다.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https://img.seoul.co.kr//img/upload/2019/04/15/SSI_20190415180236.jpg)
여수 애양원 여자 환자 숙소를 펜션으로 새롭게 복원한 ‘치유의 숲’(김봉렬 작). 옛 환자들의 숙소동이 현재 펜션의 마당이 됐다.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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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1. 초등학교 때 아버님을 따라 시골의 할아버지 댁을 두어 번 갔었다. 그곳은 전기도 대중교통도 닿지 않는 ‘깡촌’으로 어린 내게도 낯설고 불편한 곳이었다. 그러나 마을 뒷산을 넘으면 바로 바닷가로 내 또래 아이들과 물놀이하는 큰 재미도 있었다. 바다 건너편에 교회가 보이는 녹음 우거진 섬이 있어 호기심이 일었다. 그러나 친척 아이들이 들려준 얘기는 정말 무서웠다. ‘문둥이’들이 사는 곳이며 그 섬에 헤엄쳐 갔다가 사라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손양원기념관의 모습. 손양원 목사의 사진과 유품, 옥중서신 등이 전시돼 있다.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https://img.seoul.co.kr/img/upload/2019/04/15/SSI_20190415180352_O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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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기념관의 모습. 손양원 목사의 사진과 유품, 옥중서신 등이 전시돼 있다.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https://img.seoul.co.kr//img/upload/2019/04/15/SSI_20190415180352.jpg)
손양원기념관의 모습. 손양원 목사의 사진과 유품, 옥중서신 등이 전시돼 있다.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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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3. 10년 전, 여수공항 뒤에 있는 한 병원을 방문하게 됐다. 애양원이라는 이곳은 원래 미국 선교사들이 세워 나환자들을 수용해 치료하던 곳이었다. 서울의대를 졸업한 김인권 원장(현 명예원장)은 나환자 섬인 소록도에 공중보건의로 자원 복무했고 제대 후 바로 애양병원에 부임해 소외된 이들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는 우리 시대의 의인이었다. 동행했던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을 포함한 일행들은 김 원장의 고귀한 삶에 크게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40여년 전, 어릴 때 단편적 기억들의 무대는 모두 이곳 전남 여수 애양원이었다. 이제는 강같이 좁은 애양원 앞바다 건너편 공단 지역이 아버님 고향마을이 있던 곳이다. 육지에서 돌출한 반도의 끝을 본 것을 섬이라 착각했고 ‘문둥이’라 두려워한 가상의 대상은 한센병 환자들이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는 이곳 애양교회에 부임해 한센인들을 돌보다 여순반란사건(여수·순천사건)에 휘말려 두 아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세 부자의 순교묘지와 손양원기념관이 있는 이곳은 개신교의 성지로 많은 신자들의 순례지가 됐다.
![현재 모임실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남자 환자 숙소동(복원: 김봉렬 작).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https://img.seoul.co.kr/img/upload/2019/04/15/SSI_20190415180404_O2.jpg)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현재 모임실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남자 환자 숙소동(복원: 김봉렬 작).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https://img.seoul.co.kr//img/upload/2019/04/15/SSI_20190415180404.jpg)
현재 모임실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남자 환자 숙소동(복원: 김봉렬 작).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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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방문한 애양원 일원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애양원의 역사는 안타깝고 처절한 이야기다. 한국의 개신교는 조선말 개항기에 주로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됐다. 초기 선교사들은 의료 기술을 겸비한 이들이 많았는데, 미국 영사관 의사로 와서 제중원을 설립한 알렌이 대표적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1960년대까지 1000여명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활동했는데 그들은 기독교 전파뿐만 아니라 현대적 의료시설을 설립하고 교육기관을 정착시켰다.
1909년 봄날, 미국 남장로회에서 파견한 목포선교부의 포사이트 선교사는 광주의 동료 선교사가 위중하다는 소식에 말을 타고 광주로 향했다. 도중 길가에서 여자 나환자를 발견해 광주로 호송했고 광주진료소 인근의 벽돌가마터에 수용해 치료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환자들은 치료는커녕 가족과 사회에서 버림받은 불가촉천민으로 저주의 대상이었다.
당시 벽돌가마터 여환자의 비참한 모습은 이랬다. “몇 달 몇 년 동안 빗질도 않고, 옷은 더러운 넝마이며, 손발은 짓물렀다. 온몸에서 참을 수 없는 냄새가 났다. 한 발은 짚신을, 다른 발은 두꺼운 판자조각을 묶어 걸을 때마다 심하게 절뚝거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광주선교부에 한센환자의 집이 설치됐고 2년 후에는 광주나병원이 출범했다. 애양원의 역사는 바로 1909년 4월 7일, 벽돌가마터에 여환자를 수용한 날부터 시작한다. 초대 원장인 윌슨(우일선) 선교사는 체계적인 치료는 물론 나환자들의 자립자생을 위해 목공, 석공, 직조, 의료기술까지 자체 기술자들을 양성했다. 또한 교회를 설립해 신앙을 통한 재활을 시도했다. 이 신앙적 한센공동체는 이후 애양원의 전통이 됐다.
![옛 병원 창문을 통해 바라본 애양교회.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https://img.seoul.co.kr/img/upload/2019/04/15/SSI_20190415180254_O2.jpg)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옛 병원 창문을 통해 바라본 애양교회.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https://img.seoul.co.kr//img/upload/2019/04/15/SSI_20190415180254.jpg)
옛 병원 창문을 통해 바라본 애양교회.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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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방문 당시, 남환자 숙소는 모두 철거돼 그 터에 한센인 정착지인 도성마을이 자리잡았다. 병은 완치됐지만 신체적 불구로 남은 음성한센인들의 자립갱생을 위한 마을이었다. 여환자 숙소는 폐가인 채로 14동이 남았고 한성신학교는 토플하우스라는 숙소로 개조했다. 원래 병원 건물을 애양병원역사관으로 개조했고 입구 쪽에 새 병원 건물을 크게 세운 상태였다.
●1967년 건축가 조자룡 설계·김종규 전시관 증축 계획… 장장 한 세기 걸친 건축
애양원 설립부터 1950년대까지 건설된 모든 건물들은 선교사들이 계획하고, 한센인들이 건설한 일종의 민간건축이었다. 굳건한 막쌓기 돌벽과 직선적인 서양식 지붕들은 마치 18세기 유럽의 마을에 온 듯 이국적인 경관을 이룬다. 경제적 부족과 기술적 제약으로 건물은 비록 낮고 허술하지만, 소외된 이들의 초보적인 안식처로서 충분한 근원적인 건축들이다.
![애양병원 전경. 1967년 미국 남장로교의 지원을 받아 당시로서는 최신식 병원건물로 지어졌다.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https://img.seoul.co.kr/img/upload/2019/04/15/SSI_20190415180819_O2.jpg)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애양병원 전경. 1967년 미국 남장로교의 지원을 받아 당시로서는 최신식 병원건물로 지어졌다.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https://img.seoul.co.kr//img/upload/2019/04/15/SSI_20190415180819.jpg)
애양병원 전경. 1967년 미국 남장로교의 지원을 받아 당시로서는 최신식 병원건물로 지어졌다.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법주사 쌍사자석 등을 형상화한 애양병원 현관 기둥과 처마선(조자룡 작).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https://img.seoul.co.kr/img/upload/2019/04/15/SSI_20190415180337_O2.jpg)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법주사 쌍사자석 등을 형상화한 애양병원 현관 기둥과 처마선(조자룡 작).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https://img.seoul.co.kr//img/upload/2019/04/15/SSI_20190415180337.jpg)
법주사 쌍사자석 등을 형상화한 애양병원 현관 기둥과 처마선(조자룡 작).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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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디자인해 지어진 한센기념관의 증축부(김종규 작).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https://img.seoul.co.kr/img/upload/2019/04/15/SSI_20190415180327_O2.jpg)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새롭게 디자인해 지어진 한센기념관의 증축부(김종규 작).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https://img.seoul.co.kr//img/upload/2019/04/15/SSI_20190415180327.jpg)
새롭게 디자인해 지어진 한센기념관의 증축부(김종규 작).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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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양병원 역사관(앞)과 한센기념관(뒤) 전경.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https://img.seoul.co.kr/img/upload/2019/04/15/SSI_20190415180311_O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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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양병원 역사관(앞)과 한센기념관(뒤) 전경.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https://img.seoul.co.kr//img/upload/2019/04/15/SSI_20190415180311.jpg)
애양병원 역사관(앞)과 한센기념관(뒤) 전경.
여수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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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건축학자
2019-04-16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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