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그룹 창업사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창업자 고 박인천 회장은 1901년 7월 5일 전남 나주에서 출생했다. 빈농에서 태어난 박 회장은 29세에 독학으로 경찰에 입문했고, 같은 해에 이순정 여사를 배필로 맞았다. 1946년 박인천 회장은 17만원(圓)의 자본금으로 미국산 중고택시 2대를 사들였다. 오늘날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출발을 알리는 ‘광주택시’를 설립한 셈이다. 그는 사업을 확장해 1948년 ‘광주여객’을 세워 버스운수업으로 사업을 확장했다.여객사업은 1950년대 말까지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졌다. 타이어를 구하는 게 문제였다. 지금처럼 도로사정이 좋지 않은 터라 타이어는 수월하게 닳았다. 여객사업 과정에 타이어를 쉽게 구하고자 1960년 설립한 회사가 금호타이어다. 생산 초기 하루 20본 정도의 타이어를 생산했지만, 기술부족과 열악한 생산환경 등으로 시판 엄두도 못냈다. 하지만 5년 만에 KS 마크를 획득했고 이와 때를 맞춰 군납업체로 지정받으면서 타이어 사업은 놀라운 속도로 번창해 나갔다.
박인천 회장은 1972년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장남 박성용 박사(금호아시아나그룹 2대 회장)로부터 ‘지주회사’ 설립을 건의받아 10월 10일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서 자신을 비롯해 장남 박성용 박사 등 7명을 발기인으로 ‘금호실업’ 설립을 결의했다. 금호실업이란 이름은 박 회장의 아호인 ‘금호’(錦湖)를 따온 것이다.
금호실업은 금호타이어, 광주고속(현 금호고속), 전남제사, 한국합성고무(현 금호석유화학) 등의 주식 100%를 거머쥔 명실상부한 지주회사의 틀을 갖추게 된다. 또 계열사 통합관리를 위해 ‘투자사업부’를 설치해 신규사업 추진을 담당하는가 하면 그룹 공채사원 모집과 교육 등 전반적인 인력관리, 경영실적 평가 등을 수행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은 흔한 시스템이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변화였다. 사세는 확장일로를 걸었다.1973년 출범 당시 6개에 불과했던 계열사는 4년 만인 1977년에는 12개로 늘어났다. 특히 고속버스와 타이어 부문의 성장은 눈부실 정도여서 1970년대 업계 선두로 부상했다.
1984년 6월 6일 박인천 창업회장의 타계로 금호는 2세 경영시대를 열게 됐다. 장남인 박성용 그룹부회장이 아버지를 이어 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박성용 회장은 대통령 경제비서관, 부총리 특별보좌관 등을 역임했던 국정참여 경험을 경영에 결합해 실력파 전문경영인으로 주목받았다. 특히 그는 아시아나항공을 출범시키면서 취임 당시 6900억원이던 그룹 매출을 1995년 4조원 규모로 끌어 올렸다. 1996년 4월 금호아시아나그룹 3대 회장에 취임한 박정구 회장은 ‘세계 일류 기업을 만든다는 화두를 던졌다. 1995년 문을 연 금호생명환경과학연구소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강원 설악과 전남 화순 등에 잇달아 콘도를 개장해 회사의 외연을 관광과 레저까지 넓혔다.
이들에 비하면 박삼구 회장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안 살림을 맡았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그룹 구조조정이 한창이었던 2002년 9월 2일 금호아시아나그룹의 4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취임 1년 만인 2003년 외환위기 이후 지속해 온 구조조정을 완료해 위기 속 리더십을 선보였다. 이후 재도약은 시작됐다. 금호산업과 아시아나 등 반등한 계열사들의 실적에 힘입어 그룹 재건에 나섰다. 2006년 대우건설에 이어 2008년 대한통운 인수에 성공하는 등 굵직한 기업 인수합병을 성사시키며 금호의 가장 화려한 때를 이끌었다. 하지만 이 같은 외양 불리기는 지난 10년간 금호가 ‘승자의 저주’에 빠지게 된 원인이 되었다.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2015-02-26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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