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서 노조 만들다 9년간 옥고… 귀국 뒤 日책임 촉구한 일본인[대한외국인]

조선서 노조 만들다 9년간 옥고… 귀국 뒤 日책임 촉구한 일본인[대한외국인]

명희진 기자
입력 2024-07-29 00:03
수정 2024-07-29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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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과 연대’ 이소가야 스에지

화학 공장서 조선인 노동자와 협력
日 1년 반 고문… 9년간 최장 수감
패전 후엔 자국민 본국 귀환 도와
“반세기의 한민족 박해 반성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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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후 작성한 ‘사상범 인물 카드’ 속 이소가야 스에지. 일본인 카드에는 주로 1930년대 초 항일 비밀결사에 참여했던 치안유지법 위반자가 많다. 1934년 12월 26일 촬영됐다.  국사편찬위원회 전자도서관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후 작성한 ‘사상범 인물 카드’ 속 이소가야 스에지. 일본인 카드에는 주로 1930년대 초 항일 비밀결사에 참여했던 치안유지법 위반자가 많다. 1934년 12월 26일 촬영됐다.
국사편찬위원회 전자도서관
“패전 후 대다수 일본인은 자신들이 겪었던 고난을 군국주의 일본의 무모한 전쟁 행위의 결과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전에 일본의 조선 민족에 대한 반세기에 걸친 박해의 역사가 있었던 것을, 일본인은 얼마나 반성하고 있을까.”(이소가야 스에지 저서 ‘우리 청춘의 조선’)

1945년 일제 패망 후 일본이 가해자라는 사실을 제대로 마주하고 식민 지배에 대한 일본의 잘못을 끊임없이 지적했던 일본인들이 있었다. 조선인과 뜻을 같이했다는 이유로 9년 넘게 옥살이하며 버텼던 일본인 노동자 이소가야 스에지도 그런 특별한 일본인 중 한 명이다.

1907년 일본 시즈오카에서 태어난 이소가야는 소학교만 졸업하고 여러 돈벌이를 전전하며 자랐다.

1928년 징집돼 함경남도 나남에 주둔한 19사단에서 군복무를 하며 처음 조선 땅을 밟은 그는 어느 조선인 가족이 건넨 따뜻한 물 한잔에 호의를 느껴 조선인들과 함께 과수원을 꾸리겠다고 다짐했다.

과수원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제대 후 흥남조선질소비료공장에 취직한 이소가야는 식민지 시대의 엄혹한 현실과 마주한다. 흥남공장은 당시 재벌이었던 노구치 시타가우가 설립한 아시아 최대 황산암모늄 비료 및 화약(다이너마이트) 생산 공장이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온갖 화학물질을 뒤집어쓰며 주야 3교대 노동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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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가야의 사상범 인물 카드 뒷면.  국사편찬위원회 전자도서관
이소가야의 사상범 인물 카드 뒷면.
국사편찬위원회 전자도서관
그러나 조선 독립과 평화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조선인 동료들과 어울리며 이소가야는 그들의 기개에 감동해 힘을 보태기로 한다. 그는 일본 인부 책임자로 기관지 ‘노동자신문’을 찍었고 조선인들과 더불어 노동조합 건설을 추진했다.

1932년 4월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됐다.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인이라는 뜻의 ‘불령선인’에게 동조했다는 이유로 1년 반이나 흥남경찰서에서 모진 고문과 취조에 시달렸다. 일제는 ‘조선의 60만 내지인 중 유일한 비(非)국민’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이듬해 함흥형무소를 거쳐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그는 10개월 감형을 받고도 약 9년의 옥고를 치렀다. 1925~1942년 조선 내에서 치안유지법, 내란죄, 소요죄 등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일본인은 모두 18명인데 이 가운데 최장 수감 기록이다. 갖은 전향 설득 작업에도 끝까지 버티다 만기 출소한 그는 일본인 중 유일한 비전향 장기수였다.

이소가야는 일제 패망 후 일본 요청에 따라 자국민의 본국 귀환을 돕다가 1947년 1월 일본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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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0월 일본 출판사 카게쇼보를 통해 출간된 이소가야의 저서 ‘우리 청춘의 조선’. 19년간의 파란만장한 조선 체류 경험을 담담하게 담아냈다. 야후재팬 캡처
1984년 10월 일본 출판사 카게쇼보를 통해 출간된 이소가야의 저서 ‘우리 청춘의 조선’. 19년간의 파란만장한 조선 체류 경험을 담담하게 담아냈다.
야후재팬 캡처
그는 일본인은 조선인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말을 꾸준히 했고 ‘식민지의 감옥’, ‘우리 청춘의 조선’ 등 6권의 저서와 5편의 글을 통해 ‘가해자’ 일본의 책임을 지적했다. 이소가야는 농사와 미군 비행장 건설 아르바이트, 경비원 등의 일을 전전하다 1998년 91세로 삶을 마쳤다.

그의 삶을 연구해 온 변은진 전주대 교수는 28일 “많은 연구자가 그의 글을 통해 식민지와 해방 전후의 시대상을 재구성했다”며 “그의 삶의 궤적은 한국 근현대사를 보는 관점에서도 새롭게 조명해 볼 만한 가치가 크다”고 했다.

재조일본인 연구의 권위자로 말년의 이소가야와 교류했던 미즈노 나오키 전 교토대 명예교수도 “식민지 조선사회에서 노동자로 사회 변혁을 생각하고 보편주의적 가치에 입각해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며 행동하고자 한 일본인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1991년 딱 한 번 다시 한국 땅을 밟은 이소가야는 서대문형무소를 둘러보며 “일본은 한민족에 대한 속죄를 ‘죽은 자’에게도 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24-07-29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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