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 큰길-그가 말하다] (1)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국립생태원장

[한길 큰길-그가 말하다] (1)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국립생태원장

입력 2016-01-20 23:54
수정 2016-01-21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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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찾아간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연구실은 서울 서대문구 캠퍼스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방울을 몇 차례 훔친 뒤에야 연구실 문을 노크할 수 있었다. 아주 깔끔한 연구 공간이었다. 2개 벽면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들로 빼곡히 차 있었지만, 훈훈한 향내와 함께 잘 정돈된 집안 서재의 느낌이 났다. 그는 “학생들 논문 지도 때문에 많이 바쁘다”며 약속에 10분 정도 늦은 데 양해를 구했다. 무수한 방송과 강연 경험을 가진 그는 역시 달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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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에코과학연구소 연구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이화여대 에코과학연구소 연구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하버드대에서 생물학으로 박사 학위를 딴 최초의 한국 사람이라고 해서 뭐 좀 대단한 게 있나 기대했더니 아주 실망이에요. 방송에나 뻔질나게 나오고, 신문에 잡스런 글들을 쓰고 있잖아요. 교수가 연예인인 줄 아는 건지 참….” 10년 전쯤일 것 같다. 어느 날 교수회의 도중에 동료 교수가 나를 면전에 두고 이런 말을 했다. 선배라서 별다른 대꾸 없이 그냥 듣다가 나왔는데, 그날 나는 한국에서 교수직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서울대 시절 얘기다.

-사실 이런 일이 한두 번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의 의지에 따라 행동했던 일들이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나를 옥죄는 올무가 되기도 했던 것은 어쩔 수 없다. 많은 고매하신 연구자들이 “최재천은 연구는 안 하고 쓸데없이 사회문제에 나선다”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나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사회성을 탐구하는 사회생물학을 연구하는 학자다. 나는 내가 배운 것들을 충실히 실천하고 있을 뿐 옆길로 샌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내게 학문은 ‘이론과 실천의 통합’이다.

-나는 강원도 강릉에서 4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자연 속에서 뛰어노는 것이 좋았다. 논병아리를 잡고, 토끼굴을 쑤시고, 쇠똥구리를 잡아 온종일 주머니 속에 넣고 다녔다. 난 자연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요즘도 찬바람이 불면 불현듯 과거 못 이룬 신춘문예에 대한 욕심이 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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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교수가 중남미 파나마의 바로콜로라도섬에 위치한 ‘스미스소니언 열대 연구소’에서 연구하는 모습. 최재천 교수 제공
최재천 교수가 중남미 파나마의 바로콜로라도섬에 위치한 ‘스미스소니언 열대 연구소’에서 연구하는 모습.
최재천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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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마나 열대우림에서 아카시아개미를 관찰하는 장면.  최재천 교수 제공
파마나 열대우림에서 아카시아개미를 관찰하는 장면.
최재천 교수 제공
-중학교 2학년 때 우연히 백일장에 나갔다가 장원을 했다. 이후 선생님들이나 친구들은 나를 ‘시인’이라고 불렀다. 시나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고등학교에 가서도 변하지 않았다. 경복고에 진학했는데 우리 학교는 서울고와 대학 진학 성적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경기고는 너무 앞에 있었고. 교장 선생님은 서울대에 350명을 진학시키겠다는 ‘350고지 탈환’이라는 목표를 제시하고, 이과를 기존 12개 반 중 8개에서 9개로 늘렸다. 그 와중에 나는 내 의사와 반대로 이과반에 배정이 됐다. ‘문청’(문학청년)을 꿈꾸던 나는 여러 번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문과반으로 옮겨 달라고 했지만 꾸지람만 들었다.

-아들이 가난한 예술인이 될까 걱정스러웠던 아버지께서는 내가 이과에 배정된 걸 반기셨다. 우리 아이를 의대에 보낼 수 있게 됐다고 좋아하셨다. 하지만 1972년 나는 서울대 의예과에 보기 좋게 낙방했다. 재수를 해서 의예과에 재도전을 했지만 또 떨어졌다. 한 번 더 도전하겠다고 했지만 아버지께서는 “삼수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말리셨다. 결국 2지망이었던 동물학과에 들어갔다. 요즘은 입시철이 되면 나에게 “동물학자가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 오는 학생이나 학부모가 20~30명은 된다. 그렇지만 1970년대 초반에는 동물학과라는 것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원하지 않은 공부를 하려니 수업에 흥미가 없었고 일상도 무기력해졌다. 한번은 여학생을 소개받는 미팅을 나갔는데, 앞에 앉은 여학생이 전공이 뭐냐고 물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동물학과에 다닌다”고 하자 그 여학생은 “저도 괴테나 헤르만 헤세 너무 좋아해요”라며 손뼉을 쳤다. ‘동물학과’를 ‘독문학과’로 잘못 들은 것이다. 결국 그녀와 헤어질 때까지 독문학과 학생으로 행세했다. 어느 날 수업시간에 강아지풀을 입에 물고 먼 산 바라보며 딴 생각을 하고 있는데 교수님께서 “어이, 거기 강아지풀”이라고 부르셨다. 이후로 대학 4년간 나의 별명은 ‘강아지풀’이었고, 지금도 가끔 그 별명을 꺼내 드는 친구들이 있다.

-인생의 전기는 3학년 때 찾아왔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풀브라이트 교환교수로 오신 김계중 교수님이 우리 과에 영어 강의를 개설하셨다. 전공보다는 영어에 관심이 더 많았던 나는 그 수업만큼은 유독 열심히 참여했다. 그 모습은 교수님이 나를 모범생으로 착각하시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졌다. 미국으로 다시 떠나시면서 유학을 권유했다. 겉으로야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공부를 안 하는데 미국까지 날아가서 공부할 이유가 뭐야.’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김 교수님과의 만남은 나의 내면의 벽을 처음으로 깨뜨린 중대한 변화의 출발점이었다.

-얼마 후 벽안의 60대 노교수가 나를 불렀다. “미국 학회에서 김계중 교수를 만났는데 내가 한국에 하루살이 채집을 간다고 하니까 ‘부지런하고 똑똑한 친구가 있으니 조수로 쓰면 좋을 것’이라며 미스터 최를 추천하더군요.” 그는 세계적인 하루살이 연구의 대가 조지 에드먼드 펜실베이니아주립대 교수였다. 그는 하루살이를 관찰했지만, 나는 그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의 생활을 관찰했다.

-여기서 나온 놀라운 발견. ‘내가 어릴 적 고향 강릉의 자연에서 하고 놀던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니.’ 에드먼드 교수에게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미국으로의 유학 과정과 추천 교수들의 이름을 적어 줬다. 목록 제일 위에 하버드대 에드워드 윌슨 교수의 이름이 있었다.

-미국 대학에 진학하려면 학점이 최소 3.0은 돼야 했다. 그렇지만 수업시간에 강아지풀 입에 물고 먼 산만 쳐다본 나의 대학교 3학년 때까지 학점은 2.0도 안 됐다. 4학년 남은 두 학기 동안 최대한 많은 과목을 수강했다. 결국 한 과목을 빼고는 전부 A+를 받았다. 학점 제한선인 3.0을 겨우 넘은 3.04. 28개 대학에 지원서를 냈지만 펜실베이니아주립대, 플로리다대, 뉴욕주립대 3곳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 원서를 낼 때 난 생태학이란 학문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래서 자기 소개서에 ‘동물의 왕국을 하고 싶다’라고 썼다. 그걸 교수들이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나중에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 입학하자 한 교수가 “여기는 동물의 왕국을 안 가르치는데 어떡하지”라고 놀려 댔다. 생태학이라는 학문이 뭔지도 모르고 온 것 아니냐는 놀림이었다. 처음 접한 생태학은 정말 방대한 학문이었다.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야외에 나가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석사 학위를 얼른 끝내고 다른 학교로 옮겨 박사 과정에서는 꼭 ‘동물의 왕국’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하버드대에 진학해 결국 에드먼드 교수가 일러 주었던 윌슨 교수를 만났고, 그건 나의 운명이 됐다. 개미 박사인 윌슨 교수 밑에서 민벌레를 연구해 1990년 하반기에 7년 만에 ‘민벌레의 진화생물학’이란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개미 전문가인 윌슨 교수에게 지도를 받다 보니 연구 주제인 민벌레뿐만 아니라 개미에 대한 연구도 하게 됐다.

-사회생물학을 공부하다 보니 방송이나 강연 말고도 여기저기 불려다니는 일이 많았다. 교수 사회에서는 ‘이상한 놈’이라는 딱지를, 언론에서는 ‘사회 참여형 과학자’라는 호칭을 붙여 주었다. 헌법재판소 법정에 나간 적도 있었다. 호주제 위헌 여부를 판단할 때 2004년 12월 9일 마지막 공개 변론에서 호주제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해 달라고 참고인 증언 요청이 들어왔다. 나는 진화론적인 근거로 재판관들에게 강연하듯 이야기했다. 2주 뒤 호주제 위헌 판정이 났다.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호주제 찬성론자들의 항의 전화로 연구실 전화통에 불이 났다. 유림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 노인께서는 전화를 하셔서 “비싼 돈 주고 미국에 가서 아주 못된 것을 배워 왔다”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학문의 경계를 낮추고 협업을 하자는 얘기는 이전부터 있었지만, 2005년 윌슨 교수의 책 ‘통섭’이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히트할 줄은 몰랐다. 책을 번역하는 것만큼이나 영어 원서 제목인 ‘컨실리언스’(Consilience)를 어떻게 번역할지에 많은 공을 들였다. 결국 한문학을 하는 선배에게 물어봐서 단어를 조합해 만든 것이 통섭이었다. 그 말을 과거에 원효대사와 최한기 선생이 사용한 적이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됐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역사책에 있던 죽은 단어를 부활시킨 셈이 됐다. 책이 나온 뒤 ‘통섭은 인문학이 자연과학에 종속되는 일방향적 통합’이라는 학자들의 비판이 쏟아져 나오는 등 큰 논란이 됐다. 사실 학문의 발전은 논란으로 시작되는 것 아니겠나. ‘통섭 이전’과 ‘통섭 이후’의 학문적 논의는 차이가 크다고 생각된다.

-나는 과학을 대중의 수준으로 낮추는 ‘과학 대중화’가 아닌, 대중의 과학 이해 수준을 높이는 ‘대중의 과학 이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윌슨 교수가 입버릇처럼 이야기한 “과학을 대중에게 이야기하려면 자기 본래 연구도 충실히 해야 한다”는 충고를 잊지 않고 있다. 대중의 과학 이해도를 높이는 작업을 하면서도 나 자신의 연구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다. 자신의 연구를 하지 않고 대중에게 과학 이야기만 하는 사람은 그저 ‘과학 이야기꾼’일 뿐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김태균 사회부장 windsea@seoul.co.kr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최재천(61)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진화학자이자 사회생물학자다. 강원 강릉 출신으로, 가장 저명한 진화학자 중 한 명인 에드워드 윌슨 미국 하버드대 교수를 지도교수로 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미시간대 생물학과 조교수,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를 거쳐 2006년부터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3년 12월 개원한 국내 최대 생태연구 및 전시 기관인 국립생태원의 초대 원장으로도 재직하고 있다. 2000년대 중반 윌슨 교수의 저서 ‘컨실리언스’(Consilience)를 ‘통섭’(統攝)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해 국내에 ‘통섭 열풍’을 몰고 왔다. 이 책은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연구자들이 인간의 지식이 본질적으로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망을 바탕으로 협력하고 연구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세계적인 동물학자 제인 구달 박사와 함께 생명다양성재단을 설립해 환경운동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어릴적 시인을 꿈꿨던 그는 ‘알면 사랑한다’는 좌우명으로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개미제국의 발견’ 등 60여권의 책을 번역하거나 집필해 ‘대중의 과학화’, ‘과학의 대중화’를 이끌고 있다.

▲서울대 동물학 학사 ▲미 펜실베이니아주립대 생태학 석사 ▲미 하버드대 생물학 석·박사 ▲1989년 미국 곤충학회 젊은 과학자상 ▲2000년 대한민국 과학문화상 ▲2007년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2013년 국립생태원장
2016-01-21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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