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 컴퓨터서 번역 원고 발견
가족들이 타계 5년 만에 출간
“인생의 책 완역 꿈 이루고 떠나”
황현산 고려대 불문과 교수가 타계 한 달 전 번역을 마친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 완역판으로 출간됐다. 정본이라 여겨지는 2판을 기준으로, 1판에서 검열된 시 6편과 3판에서 가져온 12편을 추가해 ‘악의 꽃’ 간행사 전모를 보여 주려는 의도가 잘 드러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 산문가이자 번역가 그리고 젊은 시인들의 든든한 후원가였던 그가 타계 직전 마지막까지 매달렸던 번역 작업이 책으로 펴 나왔다. 세계문학사에서 현대시의 문을 연 시집으로 평가받는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난다) 완역판이다.
선생은 생전에 이 책을 ‘인생의 책’으로 꼽았다. 그는 “보들레르는 문학에 현대성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그 개념을 통해 현대문학 전체의 질과 방향을 바꿔 놨다”며 “‘악의 꽃’과 ‘산문시집’에 의해 문학 또는 예술 개념 자체가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의미를 짚은 바 있다.
책이 선생이 떠난 지 5년 만에 나오게 된 것은 아들인 황일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2년 전 고인의 컴퓨터를 정리하다 번역 원고를 발견하면서다. 원고의 최종 수정 시간은 2018년 7월 1일로, 그는 한 달여 뒤인 8월 8일 담도암 투병 끝에 눈을 감았다.
황 교수는 역자의 말을 대신해 쓴 글에서 “아버지는 생의 마지막 여름을 지현리 작업실에서 가족들과 함께 보냈다. 어머니에 따르면 어느 날 아버지가 ‘악의 꽃 번역을 끝냈다’며 좋아하셨다고 한다. 아버지의 원고를 보며 몹시 치열했을 당신의 그해 여름을 떠올려 본다”고 회고했다.
출간을 이끈 출판사 난다 대표 김민정 시인은 “‘악의 꽃’을 완역판으로 펴내는 게 선생님의 숙제였고, 가족들에게나 트위터 등에 번역을 완료하고 주석본 작업만 남았다고 밝히신 바 있는데 원고가 뒤늦게 발견된 것”이라며 “원문에 대한 세심한 이해를 바탕으로 유려하고 적확하게 우리말로 옮겨진 시어들로 ‘악의 꽃’의 전모를 다시 감상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주석 없는 원고를 그대로 펴내기로 한 데는 독자를 믿었던 선생의 번역 철학이 있었다. 권현승 편집자는 “늘 ‘더 나은 번역’을 위해 분투했던 선생이 생전에 번역을 마칠 수 있었던 것도 독자들의 통찰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프랑스어 시를 한국어로 번역하다 보면 용납할 수 없는 구멍을 만들어 내는 시구들이 가끔 있다. (중략) 그 용납할 수 없는 구멍이 메워지는 것은 내 번역 역량에 의해서가 아니라 두 언어를 둘러싼 문화적 환경의 발전과 독자들의 드높아질 통찰력에 의해서일 것이기 때문이다.”(‘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에서)
2023-10-25 21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