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충록: 기생충의 흥망성쇠로 본 한국 근현대사
정준호 지음/후마니타스/304쪽/1만 8000원
인분을 비료로 농사짓던 시기
기생충 알 붙은 채소 먹고 감염
1963년 여아 사망 후 ‘전쟁’ 선포
교실에서도 수치심·비정상 강조
짧은 시간에 기생충 ‘완전 정복’
1970년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선 교사가 기생충이 발견된 학생들을 교탁으로 불러내 구충제를 나눠 주고 먹게 했다.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어떤 기생충에 감염됐는지 알리고 구충제를 삼키는 모습까지 보여 주는 것은 아이들에게 수치심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기생충학을 전공한 정준호 박사는 한국에서 기생충 박멸이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수치심’과 ‘비정상’을 강조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한국건강관리협회·후마니타스 제공
한국건강관리협회·후마니타스 제공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전 국민의 90%가 배 속에 하나쯤은 키우고 있었다는 기생충이 20세기 말이 되면서 거의 ‘박멸’됐다. 이제 한국은 제3세계 기생충 관리 사업을 지원하는 상황이다. 기생충과의 전쟁에서의 승리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보건의료사와 기생충학계에서도 길이 빛날 업적이다.
기생충을 비롯한 감염성 질병 연구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영국 런던 위생열대의학대학원에서 기생충학을 공부하고 의학사(史)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이런 한국의 기생충 정복사를 꼼꼼하게 풀어냈다.
1960~1970년대 기생충박멸협회 한 관계자는 가두 검변을 할 때 검사를 받으러 나온 시민들이 “아가씨가 어디 할 일이 없어 똥 검사를 하러 다니냐”는 말에 눈물을 쏟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당시 상황을 풍자한 만화 한 컷.
한국건강관리협회·후마니타스 제공
한국건강관리협회·후마니타스 제공
기생충과 함께하는 한국인의 삶은 1960년대 초반까지도 계속됐다. 그러던 중 기생충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1963년 10월 24일 밤 10시 30분 병원 앞에 9세 여자아이가 보호자도 없이 복통으로 쓰러져 있었다. 큰 병원으로 옮겨 응급수술을 시작했는데 배 속에서 4㎏에 달하는 회충 1063마리를 꺼냈다. 회충이 너무 많아 소장 일부가 괴사돼 결국 아이는 죽었지만 이 소식으로 정부와 의학계는 기생충 박멸에 나서게 됐다.
이 책은 단순히 기생충과의 전쟁에서 나타난 좌충우돌에 관한 읽을거리만 제공하지 않는다. 책을 덮고 나면 지난 3년 동안 코로나19와의 대응 과정이 겹쳐진다. 코로나19 확산 초기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코로나19라는 용어를 쓰라고 했음에도 일부에서 우한 폐렴이라고 이름 붙여 낙인찍고 혐오를 조장했던 상황 말이다. 저자는 기생충과의 전쟁에서 사용했던 수치심과 비정상성, 편 가르기 방식으로 현대에 등장하는 신종 감염병들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겠냐고 묻는 것이 아닐까.
2023-04-07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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