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서 ‘이불-시작’ 회고전
1990년 ‘제2회 한일 행위예술제’의 일환으로 서울과 도쿄에서 12일간 벌인 퍼포먼스 ‘수난유감-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에서 이불 작가가 소프트 조각을 입고 도쿄 시내를 활보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1989년 서울 동숭아트센터 소극장. 발가벗은 여성이 등산용 밧줄에 묶여 객석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 자발적 고난은 오래가지 못했다. 고통스러운 비명이 이어지자 관객들이 달려들어 여성을 끌어내렸다. 스물다섯의 젊은 작가 이불이 말 그대로 온몸을 던져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 중심 사회에 저항한 ‘낙태’ 퍼포먼스다. 9분 51초의 기록 영상으로 남은 이 파격적인 행위 예술은 30여년이 지난 지금 봐도 묵직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세계적인 작가 이불의 초기 작업을 한자리에 모은 회고전이 마련됐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5월 16일까지 열리는 ‘이불-시작’은 여성과 여성의 신체에 대한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남성 위주의 시선을 일관되게 비판해 온 작가의 모태가 됐던 1987년부터 10여년간의 활동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첫 전시다. 작가의 시그니처가 된 소프트 조각 3점과 퍼포먼스 기록 영상 12점, 사진 기록 60여점, 미공개 드로잉 50여점 등이 공개됐다.
소프트 조각 ‘무제(갈망)연작과 ‘몬스터: 핑크’ 전시 전경.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방독면 쓰고 부채춤… 날생선 부패 과정 전시도
이번 전시에는 1988년 첫 개인전에서 발표한 소프트 조각 ‘무제(갈망)’ 연작 2점과 1998년 선보인 ‘몬스터: 핑크’를 2011년에 다시 제작한 작품 3점이 진열됐다. 1988년 ‘갈망’부터 1996년 ‘I Need You(모뉴먼트)’까지 12개 퍼포먼스 영상 기록도 만날 수 있다. 소복을 입고 물고기의 속을 가르거나(‘물고기의 노래’, 1990) 방독면을 쓰고 한복을 입은 채 부채춤을 추는(‘웃음’, 1994) 등 도발적인 퍼포먼스들에선 어떤 경계에 대한 의식 없이 권력과 위계를 조롱하고, 공고한 사회 체계와 고정관념에 균열을 내려는 작가의 폭발적 에너지가 느껴진다.
1997년 뉴욕현대미술관에 전시된 ‘장엄한 광채’(부분).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2021-03-18 25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