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마당]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르거나/이양헌 미술평론가

[문화마당]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르거나/이양헌 미술평론가

입력 2020-08-05 17:36
수정 2020-08-06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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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헌 미술평론가
이양헌 미술평론가
한국 미술비평의 오래된 장면을 떠올려 본다.

이념의 시대 1980년대는 6월 항쟁, NLㆍPD 노선 갈등, 사회구성체 논쟁에 힘입어 민주화 투쟁과 당파 경쟁이 급격히 확산되던 때다. 미술 역시 사회운동과 연동해 정치적 참여가 강조되면서 공동창작과 현장미술이 대세로 떠올랐다. 이적 표현물로 간주돼 구속으로 이어진 신학철 화백의 ‘모내기’(1987) 사건은 당시를 보여 주는 가장 선명한 역사의 이미지다.

같은 시기 미술비평계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논쟁과 함께 민중미술의 이념과 미학을 지지하는 젊은 이론가들이 1989년 2월 ‘미술비평연구회’(미비연)를 정식 발족한다. 이들은 미술사 연구, 미술 제도 및 정책 연구, 시각매체 및 대중문화 연구, 미학 및 미술비평 연구 등 조직적인 분과 체계를 갖추고 마르크스ㆍ레닌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이론과 후기구조주의 담론을 함께 공부했다. 미술계에서 여전히 주요하게 활동하는 이영철, 이영준, 이영욱, 박신의, 백지숙, 강성원, 김수기, 최범과 같은 비평가들이 모두 이곳에서 배출됐다.

미비연에게 리얼리즘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특히 지식인 작가가 소시민적 입장에서 현실을 비판하고 삶의 문제를 형상화하는 이전 세대의 민중미술 대신 루카치의 문예이론에 영향을 받은 당파적 리얼리즘을 주창했다. 이는 현실을 변혁할 수 있는 주체를 노동자로 상정하고 그 계급의 당파성을 창작방법론에 적용하려는 그들의 관점을 잘 보여 준다.

미비연은 작품에 대해서도 걸개그림 등으로 그 형식을 한정하지 않고 영상이나 설치, 비디오, 만화, 포스터 등 다양한 매체에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매체를 단순한 미술의 재료로 취급하기보다는 일종의 언어이자 이미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인식하고 사회변혁을 위해 시각매체가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주의의 붕괴와 외연적인 경제성장, 문민정부에 의한 형식적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면서 진보 진영은 운동 중심의 이념 방향을 ‘상실’했다. 미비연 역시 이 시기 대중문화에 주목하고 문화 개념을 재설정하는 등 변화를 모색했는데, 그 결과가 ‘압구정동: 유토피아/디스토피아’(1992) 전이었다. 서울 압구정동을 문화적으로 분석하고, 사회적 환경과 조건을 미술로 풀어낸 전시는 그들의 관심사가 이미 대중매체 이미지를 포함하는 시각문화 전반으로 확대됐다는 걸 표출했다.

미비연의 활동은 비평이 부재한 현대미술의 담론을 풍부하게 만들고 미술과 대중문화에 대한 이론적 연결을 가능하게 했으며 1990년대 작가들의 활동 근거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우리 현실을 반영한 이론을 제시하기보다는 서구의 문화 담론을 먼저 받아들여 번역해 소개하는 차원에 머물렀고, 엘리트주의라는 집단 정체성을 넘지 못한 점이 한계로 지적된다.

실제로 미비연이 지지했던 전위적인 작품들은 1980년대 후반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당시 민중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이었다. 또한 그들이 1990년대 들어 새로운 대안으로 모색한 대중문화의 영역 역시 행위 주체와 대항 주체를 모두 감추어 버린다는 비판과 함께 자본의 논리에 대부분 귀속된 대중문화 안에서 정치적 투쟁이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을 남긴다.

미비연은 90년대 초반의 격변하는 문화 지형에 대한 해석의 차이와 구성원들의 문화운동에 대한 서로 다른 방향 설정으로 1993년 7월 공식 해체한다. 그들이 4년 동안 보여 준 활동은 어떤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격랑하는 이론의 바다 사이에서 힘겹게 조타를 잡고 표류하는 배의 이미지. 아주 오래된,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잔존하는 비평의 한 장면일 것이다.
2020-08-06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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