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훈의 간 맞추기] 유리천장은 제도가 만들지 않았다/변호사

[유정훈의 간 맞추기] 유리천장은 제도가 만들지 않았다/변호사

입력 2022-02-15 20:18
수정 2022-02-16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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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훈 변호사
유정훈 변호사
미국에서 2월은 ‘흑인 역사의 달’로 지킨다.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다. 흑인의 실질적 권익이 후퇴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0년 대선 패배 이후 공화당은 여러 주에서 흑인의 투표를 어렵게 하는 조치를 도입했다. 흑인들이 사는 동네의 투표소를 줄이고 우편투표에 까다로운 절차를 요구하는 등 방법도 다양하다. 최근 앨라배마는 주 전체 인구의 27%인 흑인 유권자 대부분을 7개 지역구 중 특정 1곳에 몰아넣는 방식으로 선거구를 조정했다.

 이런 일이 가능해진 것은 민권운동의 성과인 투표권법을 무력화한 대법원의 2013년 셸비카운티 판결 때문이다. 이 판결에 따라 연방정부는 남부의 주에서 벌어지는 투표 방해를 통제할 권한을 잃었다. 로버츠 대법원장이 이끈 다수 의견은 “상황이 극적으로 달라졌다”는 이유를 들었다. 흑인에 대한 법적 차별을 철폐한 민권법이 시행된 지 50년 이상 흐른 지금, 구조적 인종차별은 흘러간 이야기라는 인식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인종차별 문제에 관한 반동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공화당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흑인 작가 토니 모리슨의 작품을 교육과정에서 퇴출하거나 ‘비판적 인종 이론’을 학교에서 금지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고 성공을 거둔 사례도 많다. 비판적 인종 이론은 인종차별이 개인의 편견이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는 이론으로, 대단히 거창한 게 아니다. 하지만 보수 진영은 예컨대 재키 로빈슨이 흑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선수가 됐다는 것은 가르쳐도 괜찮지만 메이저리그에서 흑인을 배제하고 차별한 역사까지는 언급하지 않아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한다. 인종차별을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로 몰고 가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가면 주류 백인들이 불편하지 않은 선까지만 인종차별을 얘기할 수 있는 사회가 되고 진정한 평등은 달성할 수 없다.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가 매년 발표하는 유리천장 지수에서 한국은 최하위를 몇 년째 지키고 있다.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2020년 기준 31.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단연 1위이고,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19%로 OECD 평균 29%를 크게 밑돈다. 이런 수준의 격차가 개인 능력의 차이, 공정한 경쟁의 결과일 리 없다.

 이처럼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구조적 성차별을 부정하면 어떻게 될지는 앞에서 본 미국의 사례를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특정 집단을 명시적으로 차별하는 법과 제도가 철폐되더라도 현실 세계에서 차별은 얼마든지 이루어진다. 제도적 차별의 철폐가 과거에 이루어진 차별의 영향이 계속되는 것을 시정하는 것도 아니다. 구조적 성차별을 부인하는 순간, 여성의 권리는 각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악화될 수밖에 없다. 이를 용납하면 우리 사회는 크게 후퇴한다. 이번 대선 전날인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2022-02-16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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