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은 IT 종사자
이 마음은 배달음식을 먹을 때 최고조에 이른다. 모든 것을 배달로 집에서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말과 같다. 간단할 거라 생각하고 주문한 순댓국에는 순댓국과 밥, 배추김치와 섞박지를 따로따로 담은 용기와 그 뚜껑까지 개수만 따져도 벌써 8개가 넘는 플라스틱이 딸려 있었다. 슬프게도 이게 끝이 아니다. 다진양념과 청양고추, 새우젓이 각각 동그란 플라스틱 통에 담겨 온다. 셈을 멈추게 된다.
이 두려움과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어 보고자, 직접 내가 음식을 해 먹기로 결심하고, 인터넷으로 식재료를 주문해 본다. 실온, 냉장, 냉동 온도마다 박스가 제각기 오거나 어린아이 몸집만 한 가방에 비닐이 꽉꽉 채워져 배달이 된다. 내가 주문한 식자재들은 쓰레기더미 사이를 뒤져야 겨우 찾아낼 수 있다. 새로운 유형의 광부가 된 느낌이다.
그래서 직접 가서 장을 보기로 한다. 이곳에선 그나마 낫겠지 싶어 필요한 물건을 담아 본다. 나는 야채와 과일을 담고 있는데, 만져지는 것은 매끈한 비닐뿐인 것이 여기도 여간 찝찝한 것이 아니다. 결국 나는 시금치를 보며 헛웃음을 내고야 만다. 시금치는 플라스틱 투명 용기에 담겨 있고, 그 용기는 ‘친환경’이라는 문구가 쓰인 비닐로 쌓여 있었다. 분명 내 기억의 시금치는 붉은색 띠로 단단히 한 단씩 묶여 있는 것이 전부였는데, 어느새 친환경 시금치는 플라스틱과 비닐에 담겨 있었다.
전문가들은 우리 인류가 마주한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 지구적 협력을 강조하고, 이를 위한 정책을 외교 사안과 정치적 과제로 제시한다. 탄소의 배출은 권력과 무기가 되었고, 결국 기후는 상호를 견제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 힘겨루기는 환경의 이야기를 거시 담론에 그치게 하는 환상을 주고, 우리와는 먼 무언가로 만들어 버렸다.
개개인은 “나 하나쯤이야”라는 면죄의 마법으로 조금의 불편함을 정당화하곤 한다. 나 역시도 이 마법의 주문에 자유로울 수 없는 현대인이기에, 매주 일요일 분리수거장이라는 심판대에 선다. 우리 모두가 “나 하나쯤이야”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더이상 이것이 ‘나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플라스틱을 시금치를 위해 쓰고 있다.
2022-08-09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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