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린 산업부 차장
지난주 취임 100일을 맞은 새 정부의 경제산업 정책에 대한 평가를 묻자 돌아온 한 기업인의 반문에는 피로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이유는 이어지는 말에서 공감이 됐다.
“요즘 기업들은 정부 정책에 희비가 엇갈린다기보다 새로운 양상으로 몰아치는 대외변수 때문에 휘청이고 있습니다. 반도체, 배터리 등 중요한 전략 자산을 우리가 갖고 있다는 건 다행이지만 미국 주도의 공급망 재편 움직임이 우리 기업에 미치는 강도가 점점 세져서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어요. 최소한 피해는 입지 않게 정부와 국회가 머리를 맞대 아이디어를 내고 외교적 노력도 해야 하는데 서로 싸우고만 있으니 걱정이 크죠.”
실제로 격화되는 미중 기술 패권전쟁의 여파에 우리 기업의 ‘생사여탈권’이 좌우되는 상황이 급전개되고 있다. 당장 최근 조 바이든 대통령의 서명으로 발효된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에 현대자동차가 직격탄을 맞았다. 미국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가 아니면 보조금 혜택에서 배제하는 게 골자다.
올 상반기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2위(점유율 14%)를 달리던 현대차는 이 법안으로 미국에서 판매하는 전기차에 대해 대당 최대 1000만원(7500달러)의 보조금을 못 받게 됐다. 자동차산업연합회에 따르면 매년 10만여대의 우리 전기차 수출이 차질을 빚을 걸로 추산된다. 1만 3000개 부품업체들의 피해도 속출한다는 전망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급히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현대차는 미국이 내건 보조금 혜택 시점에 맞춰 현지 생산 공장 착공, 가동 시기를 최대한 앞당겨 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입장이지만 그 자체도 난제다. 지난 5월 한국을 찾은 바이든 대통령이 정 회장의 미국 투자 발표에 “생큐”를 연발하고 어깨를 겯고 걷던 장면을 되감아 보면 일각의 ‘퍼주고 뒤통수 맞은 격’이라는 표현이 과하지만도 않은 상황이다.
재계에서는 “미국 정부의 입법이고 결국 자국 이익 때문에 하는 건데 우리 기업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나. 한계가 있다”며 자조의 한숨이 깊다. 한 재계 관계자는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서 산업계 파장이 큰 이슈가 발생하면 정부에서 선제적으로 동향을 파악하고 해결을 위해 추진력을 더 발휘해 줘야 하지 않나. 결국 국내 기업의 피해가 커지게 됐으니 정부의 대응이 아쉽기만 하다”고 했다. 정부는 급히 업계와 간담회를 갖고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검토’라는 카드도 꺼내 들었지만 ‘뒷북 대응이다’, ‘실효성이 없다’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당장 9월 초부터는 미국 주도의 반도체 동맹인 ‘칩4’ 첫 회의, 중국 견제 경제협의체인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장관급 회의 등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할 이벤트가 줄줄이 잡혀 있다. 반도체 업계는 미국의 인센티브를 받으면 중국 투자에 제동이 걸리는 미국 ‘반도체법’에도 초긴장이다. 기업들이 정부에 원하는 건 “지금부터라도, 피해를 보지 않게, (상대국에) 정당한 요구를 해 달라”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한미동맹을 재건했다”며 “안보동맹을 넘어 경제, 기술 분야 등 경제안보 협력을 강화해 글로벌 공급망과 외환시장을 안정시켰다”고 자평했다. 불과 일주일 전의 자평인데 현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이 말을 ‘근거 없는 자화자찬’으로 남지 않게 할 정교한 지략은 무엇인가.
2022-08-26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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