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 [씨줄날줄] 가을비/이동구 수석논설위원

    덕수궁 주변 길에 촉촉히 비가 내린다. 한여름 뙤약볕에 모두 다 녹아버린 듯 노랗고 빨간색의 생기 잃은 잎들이 뒹굴고 있다. 한기 가득 머금은 가을비는 행인들의 옷깃을 여미며 어깨 위 형형색색의 우산들을 나풀거리게 한다. 휴일 덕수궁 돌담길 산책은 여유로웠다. 우산을 받쳐 들어도 번거롭지 않았다. ‘너로 말하건 또한 나로 말하더라도 /빈손 빈 가슴으로 왔다 가는 사람이지~(중략) /비는 뿌린 후에 거두지 않음이니 /나도 스스로운 사랑으로 주고 달라진 않으리라~’(김남조, 빗물 같은 정을 주리라)라는 시구도 떠올려 봤다. 서울 도심의 행인들은 늘 바삐 걷는다. 실제 급한 일이 없더라도 습관이 된 듯하다. 누굴 만나러, 어디로, 무엇하러 가는지 모를 종종걸음만 무성할 뿐이다. 가을이 깊어 가는 시절, 빌딩 숲을 에워싸듯 흩어진 낙엽에도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 어쩌다 비라도 내리면 그제서야 마지못한 듯 걸음을 늦춘다. 인생이 아름답기 때문에 인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사랑하기 때문에 인생이 아름다워진다고 한다. 세상살이가 다 마찬가지 아닐까. 무엇인가를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세상 모든 것, 어느 것 하나라도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을 게 있을까. yido
  • [씨줄날줄] 역사 다큐 ‘백년전쟁’/전경하 논설위원

    [씨줄날줄] 역사 다큐 ‘백년전쟁’/전경하 논설위원

    ‘친일인명사전’ 편찬으로 유명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원래 명칭은 반(反)민족문제연구소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9월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반민특위는 친일파의 공격으로 겨우 1년여 뒤인 1949년 해체됐고, 반민특위 판결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제대로 집행되지 못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도 수록돼 있다. 박 전 대통령이 1940년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 2년 뒤 일본 육사 본과 3학년으로 편입, 1944년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됐다는 이유에서다. 박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씨가 당시 법원에 게재금지·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군에 혈서로 지원했다는 1939년도 신문 기사도 제시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2년 11월 박 전 대통령을 다른 각도에서 재비판했다. ‘한강의 기적’이 박 전 대통령의 업적이 아니라 미국의 동아시아 반공 정책 덕분이라는 것이다. 수출주도형 전환의 근거로 1978년 미 의회에 보고된 프레이저 보고서 및 비밀 해제된 미 기밀보고서 등을 인용해 역사 다큐로 제작했다. ‘백년전쟁-프레이
  • [씨줄날줄] 도쿄, 광주, 베이징, 홍콩/박록삼 논설위원

    [씨줄날줄] 도쿄, 광주, 베이징, 홍콩/박록삼 논설위원

    시내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서도 ‘드르륵’ 총소리가 들렸다. 헬기에서는 전단을 살포했다. ‘폭도들이 무장한 채 폭동을 벌이고 있다. 계엄군은 자위권을 갖고 있다’ 등속의 내용을 담았다. 그 시간 광주 도청 앞 상무관 바닥에는 형체도, 신원도 알아보기 힘들 만큼 피칠갑 된 시신들이 즐비했다. 또 11공수여단은 송암동에서 민간인을 무차별 사살한 뒤 인근 산에 암매장했다. 죽음의 공포가 지배하던 1980년 5월의 광주는 바깥으로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었다.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나라 미국이 신군부의 학살극을 멈춰 주길 바랐지만, 미국은 침묵하고 방관했을 뿐이었다. 40년 전 광주는 한국 안에서도, 국제적으로도 철저히 고립됐다. 꼬박 50년 전 일본 도쿄도 그랬다. 1968년 ‘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 줄여서 ‘전공투’라고 부르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수만명이 매일같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출발은 니혼대학의 재단 비리였다. 학생시위는 과격해졌고, 일왕의 참수를 공공연히 얘기하고, 반제국주의·반정부를 주장하는 사회주의 혁명의 움직임으로 확산됐다. 쇠파이프, 화염병에 사제폭탄까지 나왔다. 도쿄대를 점거한 학생들은 1969년 1월 8500명의 기동대가 진압작전을 개시해 72
  • [씨줄날줄] 국가공무원, 소방관/이순녀 논설위원

    [씨줄날줄] 국가공무원, 소방관/이순녀 논설위원

    ‘가장 먼저 들어가고 가장 마지막에 나온다.’(First in Last out) 재난과 응급 현장이 일터인 소방관들의 모토라고 한다. 위험 회피는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다. 생면부지의 타인을 구하기 위해 위험천만한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일은 그 타고난 천성을 거스르는 행위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헌신이자 최상의 사명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방관이 어느 나라에서든 공통적으로 가장 존경받는 직업인으로 꼽히는 이유도 그래서다. 특히 미국은 소방관을 영웅시하는 분위기가 매우 강하다. 우리나라도 최근 몇 년 사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희생과 헌신을 아끼지 않는 소방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널리 확산됐다. 화재 진압 후 지친 얼굴로 컵라면을 먹는 소방관의 사진 한 장이 백마디 말보다 더 큰 울림을 안겨 주기도 했다. ‘영웅’ 이미지에 가려진 소방관들의 현실은 미안함을 넘어 참담함을 느낄 정도로 열악하다. 늘 생명의 위협에 노출된 극한의 직업 상태로 일하다 보니 각종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다. 소방청이 지난 5~6월 전국 소방관을 대상으로 온라인 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5.6%(2704명)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위험군’으로 분류됐다.
  • [씨줄날줄] 전염병 공포/이동구 논설위원

    [씨줄날줄] 전염병 공포/이동구 논설위원

    세계보건기구(WHO) 전문가 패널은 지난 9월 전염병의 세계적 확산 가능성을 경고하는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는 1918년 대유행한 스페인 독감을 예로 들며 전염병이 유행할 때는 전 세계가 패닉에 빠졌다가 해결하면 곧바로 잊어버리는 어리석은 행위를 반복해 왔다고 지적했다. 당시와 비교해 인구밀도가 높아졌고, 항공여행의 발달로 36시간 안에 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어 만약 스페인 독감이 지금 일어난다면 최대 8000만명이 사망하고 손실액은 세계 경제의 5%에 미칠 수 있다고 보고서는 경고했다. WHO는 전염병의 위험도에 따라 경보 단계를 1단계에서 6단계까지 나눈다. 1단계는 전염병이 동물 사이에 한정된 상태를, 2단계는 전염병이 동물에서 소수의 사람에게 옮겨진 상태, 3단계는 사람들 사이의 전염이 증가한 상태를 말한다. 4단계는 세계적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아진 상태, 5단계는 동일 권역(대륙)의 최소 2개국에서 병이 유행하는 상태를 말한다. 최고 등급인 6단계는 전염병이 세계적으로 확산됐다는 의미로 ‘판데믹’(pandemicㆍ대유행)이라고 부른다. 판데믹으로는 중세 유럽 인구의 30%가 사망한 흑사병(페스트)이 가장 악명 높다. 1918년 스페인 독감(사망
  • [씨줄날줄] 시중은행의 생산성/전경하 논설위원

    [씨줄날줄] 시중은행의 생산성/전경하 논설위원

    11월엔 주요 시중은행의 하반기 공개 채용 합격자가 발표된다. 정부의 일자리 장려 정책에도 채용 규모는 지난해보다 줄었다. 굳이 은행 지점에 가지 않아도 스마트폰이나 인터넷뱅킹, 현금자동입출금기(ATM) 등으로 거의 모든 업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난 1월 8일 국민은행의 파업에도 고객들이 파업 사실을 느끼지 못했던 것과 같다. 금융위원회가 어제 내놓은 ‘금융환경 변화와 금융업 일자리 대응 방향’이라는 보고서도 이를 반영한다. 금융위에 따르면 은행권 취업자는 2015년 말 13만 8000명에서 지난해 말 12만 4000명으로 1만 4000명 줄었다. 설계사·모집인(-2만 5000명)과 비은행권(-2000명)까지 더해 금융권 전체 취업자는 4만 1000명이 줄었다. 금융위는 또 지난해 은행의 신규 기업대출(206조원)로 1만 3000명의 추가 고용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과거 분석 결과를 인용한 것으로 대출의 고용유발효과를 추정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으로만 참고할 필요”가 있고, “고용 증가로 운영자금 수요가 늘어 대출이 늘기도 하므로 대출 증가에 따라 고용이 증가한다는 인과관계로 해석하기는 어렵다”는 주석을 덧붙었다. 이런 주석이 붙는 숫자를 도
  • [씨줄날줄] ‘의식주’가 아닌 ‘식주금’/전경하 논설위원

    [씨줄날줄] ‘의식주’가 아닌 ‘식주금’/전경하 논설위원

    한 여성 최고경영자(CEO)는 필요한 재킷이나 핸드백 등을 각각 10만원 미만으로 온라인으로 산다. 익숙한 판매처의 쇼핑몰이라 사이즈가 익숙하고 취향도 맞는데 비싼 돈 줘가며 백화점에서 꼭 명품으로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러 가서 입어 보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도 바쁜 CEO에게는 덤이다. 물론 중요한 행사 등에서 입을 명품 정장도 두세 벌 있다. 자신을 꾸미기에 관심이 많은 10대들은 옷이나 벨트 등 패션 잡화를 온라인으로 고른 뒤 사달라며 부모에게 공유하기 일쑤다. 서울에서 주문해도 하루이틀 지나면 부산에서, 대구에서 온다. 택배가 발달한 시대 판매자가 어디에 있는지는 관심조차 없다. 정 급하면 곳곳에 있는 디자인과 제조·유통을 한 회사가 다 해서 값이 상대적으로 싼 SPA 매장에서 사서 바로 입으면 된다. 다양한 가격에, 다양한 디자인이 가능한 의류는 이제 큰 고민이 되지 않는다. 요즘은 SPA 활성화로 인해 늘어나는 의류 폐기물에 따른 환경오염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다. 그래서인지 ‘의식주’라는 말은 이제 맞지 않게 됐다. 한국소비자원이 성인 8000명을 대상으로 소비생활 중요도 등을 조사해 그제 발표한 ‘2019 한국의 소비생활지표’에
  • [씨줄날줄] 논란 재점화된 증도가자/박록삼 논설위원

    [씨줄날줄] 논란 재점화된 증도가자/박록삼 논설위원

    ‘직지심체요절’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로 만든 책이다.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라는 긴 이름이지만, 간단히 ‘직지’로 부른다. 1377년 만들어져 독일 구텐베르크의 42행 성경보다 78년 앞서 우리 전통 문화의 세계적 선진성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사례로 꼽힌다.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다만 인쇄본은 있지만 금속활자 실물이 없다는 점, 그 인쇄본마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가 있다는 점이 많은 한국인들의 가슴 한 구석을 뻥 뚫린 듯 만들었다. 2010년 9월 놀라운 발표가 있었다. 직지보다 138년 앞서는 금속활자 실물 109점이 발견됐다는 내용이었다. 고려시대 ‘증도가’(證道歌) 인쇄에 사용한 금속활자 실물, ‘증도가자’를 발견했다는 사실은 세계사적 사건으로 꼽힐 수 있었다. 소장자인 다보성미술관에서 먼저 신청한 것이 아니라 당시 문화재청 정책국장이 소장자를 찾아가 국가문화재 지정을 신청하라고 요구해서 국가문화재 지정이 추진됐다. 하지만 문화재위원회는 7년에 걸친 심의 끝에 증도가자의 국가문화재 인정을 부결했다.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등 결과를 보면 고려 금속활자의 가능성은 있으나 증도가를 인쇄
  • [씨줄날줄] 부모 찬스/전경하 논설위원

    [씨줄날줄] 부모 찬스/전경하 논설위원

    국토교통부의 실거래가 공개 시스템 등에 따르면 지난 6월 서울 서초구 아크로리버파크 전용면적 84.97㎡를 27억 4000만원에 매매계약한 A씨는 30대 초반이다. 은행 대출 없이 산 것으로 등기부등본에 나와 있다. ‘평당 1억원’인 아크로리버파크를 올 들어 산 사람 중에는 30대가 제법 있다. 국세청은 어제 올 들어 9월까지 서울 지역 아파트를 산 사람 중 30대 이하가 31.1%라고 밝혔다. 대다수가 사회 초년생으로 자산 형성 초기인 경우가 많아 자금 출처를 조사하고 있단다. 이른바 ‘부모 찬스’를 썼는지에 대한 검증이다. 30대라도 사업에 성공했거나, 상속(증여)세를 제대로 내고 재산을 물려받았거나, 연봉 많이 주는 회사에 취직해 돈이 많을 수 있다. 세금을 제대로 안 냈다면 국세청 조사에서 발각되겠지만 행여 회사 취업에 부모 찬스가 쓰였다면 발견이 쉽지 않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는 지난 9월 말 영국계 투자은행(IB) 바클레이스에 벌금 630만 달러(약 73억원)를 부과했다. 바클레이스가 고객사 임원 자녀나 지인을 인턴이나 정직원으로 불법 채용하고 대신 채권 발행 주관사로 선정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해당 고객사에는 금융위기 때인 2009년 채
  • [씨줄날줄] 보잉의 땜질 처방/장세훈 논설위원

    [씨줄날줄] 보잉의 땜질 처방/장세훈 논설위원

    미국의 보잉과 유럽의 에어버스는 글로벌 항공기 제작 시장에서 양대 산맥이자 숙명의 라이벌이다. 연륜만 놓고 보면 보잉과 에어버스는 ‘할아버지와 손자’ 격이다. 1916년 설립된 보잉은 항공산업의 역사 그 자체다. 에어버스는 프랑스·독일·영국 등의 업체들이 손을 잡고 1969년 공식 출범했다. 미국 업체와 경쟁하기 위한 대항마였다. 이후 1990년대까지만 해도 보잉이 경쟁에서 우위를 점했지만 2000년대 들어 엎치락뒤치락하는 양상이다. 2000년대 초반 보잉은 당초 추진해 온 500석 규모의 초대형 여객기 ‘747X’ 시리즈 개발 계획을 보류하는 대신 크기는 작지만, 음속에 버금가는 속도로 비행하는 `소닉 크루저’ 개발에 주력했다. 반면 에어버스는 2005년 ‘하늘 위의 호텔’로 불리는 A380을 발표하면서 대형 장거리 여객기 시장에 도전장을 던졌다. 당시 국제 유가 상승은 ‘빠르게’에 주력했던 보잉이 아닌 ‘싸게’에 초점을 맞춘 에어버스의 손을 들어 주는 역할을 했다. 2010년대에는 저비용항공사(LCC)들의 급성장, 지역과 지역을 잇는 이른바 ‘포인트 투 포인트’(Point to point) 항공운송 전략 등과 맞물려 두 업체의 경쟁이 다양한 기종으로 확
  • [씨줄날줄] 형제복지원과 해외 입양/전경하 논설위원

    [씨줄날줄] 형제복지원과 해외 입양/전경하 논설위원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입양아는 681명으로 이 중 해외 입양이 303명(44.5%)이다. ‘고아 수출국’이란 오명을 벗고자 2007년부터 국내 입양을 5개월간 먼저 추진하고 그 이후 해외 입양을 추진하도록 관련법이 바뀌면서 국내 입양이 해외 입양보다 많아지긴 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 국내총생산(GDP)이 세계 12위인 한국이 여전히 고아 수백명을 해외로 보낸다. 입양아는 부모가 양육을 포기한 경우도 있지만 잃어버린 경우도 있다. 경찰청이 최근 한국 출신 미국 입양인이 만든 비영리단체 325KAMRA와 협력해 국내 장기실종 아동 가족의 유전자를 채취, 해외 거주 입양인과 대조하는 사업을 추진하는 이유다. 10년 이상 실종자가 540여명이라는데 정부의 입양아 유전자 대조가 막 시작됐다는 점에서 그동안 정부는 무엇을 했나 싶다. AP통신이 지난 9일(현지시간) 부산의 형제복지원이 돈벌이를 위해 아동들을 해외 입양시켰다고 보도했다. 입양아 19명에 대한 직접 증거를 확보했고, 이들 외에 51명 이상을 해외 입양시킨 것으로 추정되는 간접 증거도 찾았다고 전했다. 형제복지원에서 노역을 했던 이재식·김상하씨는 갓 태어난 아기부터 4살 정도까지 아이 8
  • [씨줄날줄] ‘펭수’의 진화/박록삼 논설위원

    [씨줄날줄] ‘펭수’의 진화/박록삼 논설위원

    1980년대 TV 프로그램 ‘뽀뽀뽀’ 속 ‘뽀미 언니’의 말은 절대진리였다. 뽀미 언니는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면 안 되고 약속을 잘 지켜야 하며, 만나고 헤어질 때 반갑게 인사해야 하며, 친구들과 싸우더라도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일상의 도덕률을 충실히 가르쳤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뽀미 언니와 자연스럽게 헤어졌겠지만, 어른이 된 뒤에도 많은 이가 여전히 그 가르침의 자장 안에서 지내고 있다. 어린이들의 절대 캐릭터는 이후로 쉼없이 바뀌어 왔다. 1990년대 뚝딱이가 잠시 인기를 얻었고, 2000년대 들어 방귀대장 뿡뿡이와 짜잔형이 왔다 갔고, 번개맨이 정의와 도덕의 수호자로 나타났다. 2003년 뽀로로가 아이들 사회를 평정하기 전까지 유년기 사회화 교육을 담당했던 이들이다. 이상한 캐릭터가 등장했다. ‘펭수’다. ‘우주 대스타’가 되려고 남극에서 왔다는 10살 펭귄. 교육방송(EBS)에 나타난 캐릭터임에도 별로 교육적이지 않다. 방탄소년단(BTS)만큼 유명해지고 싶다는 펭수의 말과 행동에는 교훈적 내용 따위는 없다. 혹자는 그를 가리켜 ‘무례하게 생겼다’고도 말하지만 생긴 게 무례할 리 없다. 그저 내숭 없이 속내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며,
  • [씨줄날줄] 놀아난 국민 프로듀서/이종락 논설위원

    [씨줄날줄] 놀아난 국민 프로듀서/이종락 논설위원

    TV 오디션 프로그램은 스웨덴의 한 방송사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방송사 PD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자 연예인 출연진을 찾지 못한 제작진이 급하게 일반인을 등용한 데서 시작됐다. 이후 영국과 미국의 ‘브리튼스 갓 탤런트’와 미국의 ‘아메리칸 아이돌’이라는 프로그램이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전 세계로 확산됐다. 영국의 ITV와 아일랜드의 TV3가 방영하는 ‘브리튼스 갓 탤런트’는 유럽 전역에서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 돼 결승전은 6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아메리카 갓 탤런트’에는 연인원 7억 5000만명이 전화·인터넷·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투표에 참여한다. 30초짜리 광고 한 편이 70만 달러(약 8억 9000만원)에 달했고, 결승전 방영 때에는 130만 달러(약 15억원)까지 치솟았다. 미 폭스TV가 방영한 ‘아메리칸 아이돌’은 전성기 때인 2006년에는 시청자 수가 주당 평균 3740만명을 돌파했다. TV 오디션 프로그램은 우리나라에서도 2009년부터 케이블TV 엠넷(Mnet)의 ‘슈퍼스타K’라는 프로그램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허각, 울랄라세션, 버스커버스커, 솔로로 독립한 장범준, 로이킴 등이 슈퍼스타로 등극했다
  • [씨줄날줄] 행운의 상징 ‘아기상어’/이동구 논설위원

    [씨줄날줄] 행운의 상징 ‘아기상어’/이동구 논설위원

    할리우드 여배우 메릴린 먼로가 뭇 남성의 연인으로 사랑받았다면, 비슷한 시기의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는 세계 여성팬들의 로망이었다. ‘상류사회’(1956년)라는 뮤지컬 영화에 출연한 뒤 모나코 왕자와 결혼하면서 당대의 신데렐라가 됐다. 특히 이 영화에서 행운의 징표로 받은 지폐 덕분에 신데렐라가 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미국 사회에서는 ‘2달러 지폐’가 행운의 상징이 됐다. 1928년 미국의 연방준비은행에서 최초로 발행한 2달러짜리 지폐는 지불 수단으로는 불편함이 많아 사실 잘 사용되지 않았지만, 이후 지금까지 국가에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념으로 발행되고 있다. 유럽인뿐 아니라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네잎클로버’는 나폴레옹의 목숨을 구해 준 일화가 알려지면서 행운의 상징이 됐다. 몽골인들은 어깨 위에 독수리를 올려놓으면 1년 동안 행운이 함께한다고 믿는다고 한다. 태국과 미얀마에서는 코끼리를 행운의 상징으로 여기며, 코를 높이 든 코끼리일수록 큰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일본과 러시아에서는 인사하는 고양이 ‘마네키나코라’와 나무 인형 ‘마트료시카’가 행운의 상징으로 통한다. 최근 미국에서는 우리나라의 한 출판사가 제작한 동요 ‘아기상어’(Baby Sh
  • [씨줄날줄] 술병 연예인/장세훈 논설위원

    [씨줄날줄] 술병 연예인/장세훈 논설위원

    소비재를 제조·판매하는 기업들은 포장을 중시한다. ‘포장은 침묵의 판매원이다’라는 표현은 소비자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해 포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대변한다. 포장은 원래 상품 파손을 막고 운반·보관 등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고안됐으나 지금은 판촉 마케팅의 핵심 요인으로도 자리잡았다. 포장이 지나치면 소비자 불만을 낳을 수 있다. 한때 ‘질소를 샀더니 과자를 덤으로 준다’는 냉소를 불러왔던 국내 과자류와 과대 포장 논란이 끊이지 않는 명절용 선물세트 등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포장에서도 이른바 ‘골디락스 전략’이 요구된다. ‘골디락스와 세 마리 곰’ 동화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경제에서는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이상적인 상황을 빗댄 것이다. 주류 포장에서 핵심 요소는 라벨이다. 병의 모양이나 색상으로도 차별화를 이끌어 내지만, 라벨은 해당 술의 핵심 정보를 담고 있고 가치를 상징한다. 라벨을 제대로 볼 줄 안다면 소비자들의 선택에도 도움이 된다. 와인이나 위스키 등이 대표적이다. 라벨의 사전적 의미는 ‘종이 등에 물건에 대한 정보를 적어 붙여 놓은 표’다. 하지만 상품과 무관한 정보가 담기기도 한다. 최근 보해양조는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와 손을 잡고 소주와
  • [씨줄날줄] ‘밈’(Meme) 공장, 틱톡틱톡/이지운 논설위원

    [씨줄날줄] ‘밈’(Meme) 공장, 틱톡틱톡/이지운 논설위원

    ‘밈’(Meme)은 “웃기고, 재미있고, 희화화된 것”이다. ‘인터넷 밈’은 “기존의 유행어ㆍ행동 등을 모방 또는 재가공해 인터넷에 올린 사진이나 영상”을 말한다. 오래된 TV 광고가 재가공, ‘2차 창작’ 과정을 거쳐 다시 인기를 끄는 요즘 현상이 그러한 것이다. 미국 잡지 뉴요커는 일전에 ‘밈 공장(팩토리)’으로 비디오 공유 앱 ‘틱톡’(Tiktok)을 지목했었다. 당연히 청소년들이 주 사용층이다. 미국에서만 2650만명이 애용 중이다. 이 중 약 60%가 16∼24세다. 2017년 출시 이후 10억회 이상 다운로드를 기록했다. 한 미국의 시장조사기관에 따르면 올 1분기까지 5분기 연속 다운로드 1위였다. 최근에는 방탄소년단(BTS)을 통해 또 한번 이름을 날렸다. 지난 9월 계정 개설 3시간31분 만에 팔로어 100만명을 돌파했다. 1개월 뒤에는 1800만명이 됐다. 모기업은 ‘바이트댄스’로, 중국에 본사를 두고 있다. 지난해 일본 기업 소프트뱅크로부터 30억 달러를 투자받았고, 기업 가치는 780억 달러(약 91조원) 이상으로 평가됐다. 내년 초쯤 홍콩 증시 상장을 저울질하고 있다. 틱톡 스스로는 자신들의 장점을 이렇게 홍보한다. 우선 ‘자동 번역
  • [씨줄날줄] 인재 영입/박록삼 논설위원

    [씨줄날줄] 인재 영입/박록삼 논설위원

    중국 고전 ‘삼국지연의’ 속 유비가 제갈공명을 책사로 스카우트하기 위해 세 번 찾아가 결국 마음을 되돌렸다는 삼고초려(三顧草廬) 고사는 익히 알려져 있다. 유비의 인재 영입은 대성공이었다. 제 땅 한 뼘도 없이 ‘한(漢) 왕실의 후손’이라는 껍데기뿐이던 유비는 제갈공명의 천하삼분지계로 조조, 손권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대륙을 정족지세(鼎足之勢) 형국으로 만들어 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야당 시절부터 정치적 위기 혹은 도전의 시기마다 인재 영입의 승부수로 정국을 헤쳐 갔다. 1987년 대선 패배 직후 13대 총선에서 평민당을 제1 야당으로 만들 때도, 1992년 정계 은퇴 약속을 번복한 뒤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할 때도 늘 새로운 인물을 영입하면서 위기를 돌파해 나갔다. MBC 앵커로 인기를 누리던 정동영, 재야의 거목 김근태, 천정배 변호사, 추미애 변호사, 소설가 김한길, 학생운동의 스타였던 김민석ㆍ임종석ㆍ이인영 등 ‘젊은피’ 수혈은 정치인 김대중의 든든한 자산이 됐다. 중도층으로 지지를 넓혀 가면서 재야와 나누고 있던 민주세력의 대표성까지 얻을 수 있었다. 이렇듯 정치권의 인재 영입은 지지세력을 확장할 뿐 아니라 정당의 정체성을 더
  • [씨줄날줄] 면세점 수난시대/전경하 논설위원

    [씨줄날줄] 면세점 수난시대/전경하 논설위원

    2015년은 ‘면세점 대전(大戰)’의 해였다. 관세청은 그해 7월 서울 시내 신규 면세점(대기업 2, 중소·중견기업 1) 3곳, 11월 면세특허권이 끝나는 대기업 면세점 3곳의 선정 결과를 발표했다. 신규에는 시장의 예상과 달리 한화갤러리아가 HDC신라면세점과 함께 선정됐다. 11월의 롯데월드타워점 특허는 두산으로, SK워커힐 특허는 신세계DF로 넘어갔다. 한화와 두산의 등장에 면세점 지형이 어떻게 변할까에 관심이 쏠렸다. 한화는 지난달 서울 여의도 갤러리아면세점63 영업을 끝냈다. 두산은 지난 29일 특허 반납을 결정해 서울 중구 두타몰면세점 영업을 내년 4월 말 끝낸다. 이 두 대기업은 특허 기간인 5년을 채우기도 전에 철수했거나 철수할 예정이다. 오락가락하는 정부 정책 탓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던 면세점 시장은 출혈 경쟁시장으로 바뀌었다. 면세점은 2013년 관세법 개정안에 따라 특허 기간이 10년에서 5년으로 줄었고,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자동 갱신되던 기존 업체 특허는 만기에 재심사를 받아야 했다. 2015년 11월이 개정안이 적용된 첫 심사였다. 서울 시내 면세점은 2016년 4개가 더 생겼다. 감사원의 2017년 감사 결과에 따르면 박근혜
  • [씨줄날줄] 레깅스 논쟁/이순녀 논설위원

    [씨줄날줄] 레깅스 논쟁/이순녀 논설위원

    레깅스를 입은 여성의 뒷모습을 몰래 촬영한 남성이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레깅스 논쟁에 다시 불이 붙었다. 해당 남성은 지난해 버스 안에서 레깅스를 입은 여성의 하반신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촬영하다 적발됐다. 1심은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으로 벌금 70만원과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24시간 이수를 명령했다. 그러나 2심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레깅스는 운동복을 넘어 일상복으로 이용되고 있다. 몰래 촬영이 피해자에게 불쾌감을 유발한 것은 분명하지만 성적 수치심을 줬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레깅스 패션이 유행하면서 공공장소에서 보기 민망하고, 불편하다는 비판과 패션의 자유라는 주장이 첨예하게 맞서 왔다. 미국처럼 패션에 상당히 개방적인 나라도 레깅스 논쟁은 골치 아픈 사회문제가 된 지 오래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7년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이 레깅스를 입은 10대 여성의 비행기 탑승을 거부했다가 곤혹을 치른 일이다. 지난 3월 인디애나주 가톨릭계 사립대인 노트르담대학 신문에 레깅스 패션을 ‘노예 의상’이라고 비판하는 기고문이 실리자 일부 학생들이 ‘레깅스를 입을 자유’를 외치는 ‘레깅스 프라이드
  • [씨줄날줄] 백악관 상황실/전경하 논설위원

    [씨줄날줄] 백악관 상황실/전경하 논설위원

    2011년 5월 1일 미국 동부 시간으로 밤 11시가 넘은 시각에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정의는 실현됐다”며 9·11테러를 지휘한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며칠 뒤 사살 장면이 생중계된 백악관 상황실 사진이 공개되면서 오바마의 모습이 다시 이목을 끌었다. 현장 작전팀과 교신하는 합통특수작전사령부 부사령관 마셜 웹 준장이 군복을 입고 테이블 상석에 앉아 있었다. 최고 군 통수권자인 현직 대통령은 폴로 티셔츠에 잠바를 입고 구석에 놓인 접이식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테이블 옆에 있는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보다 지위가 낮아 보였다. 백악관 전속 사진작가 피트 수자가 촬영한 이 사진에 얼굴이 조금이라도 나오는 사람은 13명.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고,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모든 사람의 시선은 모니터 화면에 꽂혀 있었다. 백악관 상황실에는 여러 회의실이 있고 평상시에는 앉는 자리가 정해진 회의실에서 회의가 열린다고 한다. 피트 수자는 빈라덴 사살 작전인 ‘넵튠의 창’을 보려고 안보팀이 작은 회의실로 옮겼고, 오바마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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