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어설픈 위로·뻔한 조언 사절”… ‘졸업 축사’ 진땀빼는 대학들

[단독] “어설픈 위로·뻔한 조언 사절”… ‘졸업 축사’ 진땀빼는 대학들

홍인기 기자
홍인기 기자
입력 2017-02-07 22:38
수정 2017-02-08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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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살아보라’ 하고 싶지만 취업난 알면서 차마 말 못해

응원 담은 공감 메시지 ‘숙제’
“미래? 도전? 취업생용 축사”
취준생들, 졸업식 대신 스터디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대다수 학생들에게 졸업식은 마냥 반가운 행사가 아닐 겁니다. 사실 젊을 때 원하는 일을 하면서 ‘함부로 살아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취업이 어려운 현실을 감안하면 그런 말을 축사에 담기가 어렵죠.”
이정구 성공회대 총장이 오는 16일 열릴 졸업식에서 어떤 축사를 할지 고심하는 이유다. 역대 최악의 청년실업률(9.8%)과 예년보다도 줄어든 취업 자리 때문에 쉬이 축사의 내용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도 제자들이 희망을 접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축사에 담아야겠죠.”

졸업식을 앞두고 축사를 맡은 총장, 동문회장, 외부인사들은 고민이 깊다. 도전정신을 강조하고 싶지만 계속되는 불황에 취업 경쟁은 날로 치열해지니 마냥 희망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10년부터 매년 35만명을 넘긴 입학생들은 줄줄이 사회로 나오는데, 근로자 300인 이상 기업의 상반기 채용인원은 3만명에 미치지 못한다. 축사에 위로와 응원을 담으면서도 청년들의 공감을 끌어내야 하는 어려운 숙제 앞에 놓여 있다.

박종구 서강대 총장도 오는 14일 열리는 졸업식의 축사 내용을 정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그는 “졸업생들이 지금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고 했다. 기성세대의 잘못된 윤리 의식이 학생들의 도전 정신으로 밝힌 촛불을 꺼뜨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 혼탁한 사회를 정화할 그들의 역할 등을 떠올리고 있다. “결국 졸업생들에게 힘을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생의 터닝포인트 중 하나인 대학을 졸업한 그들은 어떤 역경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전하고 싶죠.”

단과대학 졸업식에서 축사를 했던 김재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대학을 떠나는 학생들이 어떻게 사회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주제 의식 자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며 “다만 양극화, 부의 불균형 문제, 실업난 등 시대적 화두를 고려해야 공감하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마냥 꿈꾸는 듯한 축사는 외면당하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졸업 예정자 이모(27)씨는 “아프니까 청춘이든, 청춘이니까 아프든 중요한 건 어떻게든 취업해 내 아픔을 끝내는 일”이라며 “미래, 도전 등 취업생에게만 해당되는 축사는 사양한다”고 말했다.

졸업 예정자 서모(24·여)씨에게도 취업이 먼저다. “졸업식이 취업스터디와 시간이 겹쳐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는 그는 “취업한 친구들만 참석하기 때문에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실제 지난해 2월 서울지역 대학 10곳의 총장 축사를 분석한 결과 ‘미래’라는 단어가 36회로 가장 많이 쓰였다. ‘미래 개척’, ‘미래 지향’, ‘미래를 향해 도약’ 식이다. 이어 꿈(31회), 노력(24회), 도전(19회), 성공(16회), 목표(13회) 순이었다. 상당수 축사가 “사랑하는 졸업생 여러분”으로 시작해 “미래는 여러분의 몫이다”로 끝났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2017-02-08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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