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소련의 유리 가가린은 1961년 4월 12일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지구 상공을 일주해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로 기록됐다. 그는 당시 공군 중위였는데, 우주 비행 이후 소령으로 2계급 특진됐다. 그는 대령이던 1968년 3월 27일 MiG15기의 시험 비행 도중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공군 조종사라는 고유의 역할에 끝까지 충실한 것이다. 1960년 설립된 모스크바 외곽의 유리 가가린 우주인 훈련센터(GCTC)는 1969년 그의 이름을 붙였다.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은 1969년 7월 20일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했다. 암스트롱은 해군 조종사, 올드린은 공군 조종사 출신으로 모두 한국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다. 이후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우주비행사로 선발됐는데, NASA는 지금도 우주비행사로 활동하는 기간 동안에도 현역 군인의 신분을 유지시키는 전통이 있다. 태양계 탐사를 앞두고 지난해 선발한 우주인 가운데도 조종사인 니컬 오나푸 맨 해병대 소령, 앤 매클레인 육군 소령 같은 여성장교의 이름이 보인다.
옛 소련과 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유인우주선의 발사를 성공한 나라는 중국이다. 양리웨이 공군 중령은 2003년 10월 15일 선저우(神舟) 5호를 타고 21시간 20분 동안 지구궤도를 14바퀴 돈 뒤 네이멍구 초원지대로 무사 귀환했다. 그는 우주 비행 이후 대령으로 진급했고, 2008년에는 소장 계급장을 달았다.
일본인으로 가장 먼저 우주 체험을 한 사람은 방송기자인 아키야마 도요히로지만, 최초의 ‘공식’ 우주인은 모리 마모루 일본 항공우주연구원(JAXA) 연구원이다. 그는 1992년 미국의 우주왕복선 엔데버호의 탑승과학기술자로 8일 동안 우주를 여행했다. 처음 우주비행에 앞서 7년 동안 준비한 그는 2000년 두 번째 우주비행에 나섰다. 이후 일본 우주개발 및 과학기술 발전의 전도사로 역할을 했다.
이소연 박사는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의 선임연구원으로 2008년 4월 8일 러시아의 소유스 우주선에 올라 한국 최초의 우주인이 됐다. 일본을 벤치마킹한 셈이지만, 이 박사는 2012년 미국의 경영학석사(MBA)에 등록하더니 아예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가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우주인 부재 시대’의 결정적 원인이 항공우주 정책의 한계 때문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래도 그를 길러내는 데 260억원이 들었다. 돈도 돈이지만 그동안 들인 국가적 노력이 아깝다. 선진국이 대부분 군인을 우주인으로 선발하는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주인이 좌고우면하지 않도록 정책을 추진하지 못한 것은 문제다. 하지만 어차피 어려운 여건에서 한눈팔지 않고 일생을 바칠 인재를 선발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크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은 1969년 7월 20일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했다. 암스트롱은 해군 조종사, 올드린은 공군 조종사 출신으로 모두 한국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다. 이후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우주비행사로 선발됐는데, NASA는 지금도 우주비행사로 활동하는 기간 동안에도 현역 군인의 신분을 유지시키는 전통이 있다. 태양계 탐사를 앞두고 지난해 선발한 우주인 가운데도 조종사인 니컬 오나푸 맨 해병대 소령, 앤 매클레인 육군 소령 같은 여성장교의 이름이 보인다.
옛 소련과 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유인우주선의 발사를 성공한 나라는 중국이다. 양리웨이 공군 중령은 2003년 10월 15일 선저우(神舟) 5호를 타고 21시간 20분 동안 지구궤도를 14바퀴 돈 뒤 네이멍구 초원지대로 무사 귀환했다. 그는 우주 비행 이후 대령으로 진급했고, 2008년에는 소장 계급장을 달았다.
일본인으로 가장 먼저 우주 체험을 한 사람은 방송기자인 아키야마 도요히로지만, 최초의 ‘공식’ 우주인은 모리 마모루 일본 항공우주연구원(JAXA) 연구원이다. 그는 1992년 미국의 우주왕복선 엔데버호의 탑승과학기술자로 8일 동안 우주를 여행했다. 처음 우주비행에 앞서 7년 동안 준비한 그는 2000년 두 번째 우주비행에 나섰다. 이후 일본 우주개발 및 과학기술 발전의 전도사로 역할을 했다.
이소연 박사는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의 선임연구원으로 2008년 4월 8일 러시아의 소유스 우주선에 올라 한국 최초의 우주인이 됐다. 일본을 벤치마킹한 셈이지만, 이 박사는 2012년 미국의 경영학석사(MBA)에 등록하더니 아예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가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우주인 부재 시대’의 결정적 원인이 항공우주 정책의 한계 때문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래도 그를 길러내는 데 260억원이 들었다. 돈도 돈이지만 그동안 들인 국가적 노력이 아깝다. 선진국이 대부분 군인을 우주인으로 선발하는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주인이 좌고우면하지 않도록 정책을 추진하지 못한 것은 문제다. 하지만 어차피 어려운 여건에서 한눈팔지 않고 일생을 바칠 인재를 선발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크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2014-06-27 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