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대자보 파문/손성진 수석논설위원

[씨줄날줄] 대자보 파문/손성진 수석논설위원

입력 2013-12-18 00:00
수정 2013-1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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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보는 언로(言路)가 막혀 있던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실정(失政)이나 수탈을 비방하는 익명의 글귀를 동네 어귀나 저잣거리, 성문, 포구 등 인적이 많은 곳에 붙였다. 벽에 건다는 의미로 ‘괘서’(掛書) 또는 ‘벽서’(壁書)라고 했다. 1504년에는 연산군의 폭정을 비난하는 괘서가 장안 곳곳에 나붙었다. 1547년에는 문정대비의 수렴청정을 비방하는 벽서가 양재에서 발견돼 정미사화(丁未士禍)의 발단이 됐다. 1804년에는 이달우와 정의강의 주도로 삼정(三政)문란을 공격하는 괘서가 서울의 사대문에 붙었고 두 사람은 극형을 당했다. 괘서의 효시는 통일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고려 때도 있었다고 한다. 비슷한 형태로 오늘날에도 쓰는 ‘글을 던지다’는 의미의 ‘투서’(投書)가 있고 ‘비서’(飛書)라고도 불렀다.

대자보는 매스미디어가 없거나 있더라도 통제를 받는 시대에 민중이 의견을 피력하고 정보를 전달하는 목적으로 생겨났다. 프랑스에서는 1871년 파리코뮌 시대에 왕당파에 반대해 공화제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벽보를 붙였다. 옛 소련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대자보가 나붙었고 중국에서는 ‘대장정’(大長征) 후인 1930년대 후반부터 자유로운 언론의 통로로 대자보가 이용됐다.

대자보란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때는 중국의 문화혁명기였다. “군(君)들에게 말하겠다. 사마귀는 수레바퀴를 멈출 수가 없고, 개미는 거대한 나무를 뒤흔들 수 없다.” 이런 글귀를 담은 대자보가 1966년 5월 25일 베이징대에 붙었다. 7명이 연명한 이 대자보는 당간부 3명을 공격했는데 공격받은 측이 바로 반박 대자보를 붙여 논쟁이 격화됐다. 1970년대에는 자본주의를 따르는 주자파(走資波)였던 덩샤오핑이 극좌파들의 대자보 공격을 받았다. 천안문 사태에서도 대자보는 예외 없이 등장했다.

국내에서 대자보는 1970~90년대 대학가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건물 벽이나 내부 계단, 창문 등 어디든 나붙어 독재의 실상을 알리고 시위를 선동하는 역할을 했다. 대자보는 불온문서와 다름 없이 취급됐으며 붙자마자 철거되기도 했다. 1986년 서울대에서는 불온 대자보를 붙인 혐의로 운동권 학생 수십명이 검거되거나 수배당했다. 이른바 ‘서울대 대자보 사건’이다. 쓴 학생을 밝혀내기 위해 경찰은 370여명의 필적감정을 벌였다. 언론자유화와 인터넷,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의 보급으로 뜸했던 대자보가 부활했다. 학생들 사이에 작금의 현실에 대한 공방이 뜨겁다. 내용을 떠나 첨단 디지털 시대에 사라져간 아날로그식 표현 방식이 대중의 시선을 잡은 셈이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2013-12-18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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