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1월 21일 청와대를 떠나는 20대 때의 박근혜 대통령 모습이 찍힌 사진이 있다. 이 한 장의 흑백사진에는 50대의 중년 신사가 등장한다. 창졸간에 양친을 잃고 험한 세파 속으로 나아가는 ‘대통령의 딸’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시선이 안경 너머로 전달돼 온다.
그가 바로 ‘집(서울 화곡동 자택)을 짓다가’ 졸지에 불려 나가 경제관료가 된 남덕우씨다. 구순을 앞두고도 “컴퓨터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며 젊게 살던 그도, 매일 팔다리와 허리 관절을 좌우로 열 번씩 돌리며 건강관리에 철저했던 그도 세월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지난 18일 89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비판만 하지 말고 직접 와서 해 보라”며 대학 교수였던 그를 재무부 장관으로 발탁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고인을 ‘경제대통령’이라고 부르며 무한 신뢰를 보냈다. 재무장관 5년에 경제기획원장관 겸 경제부총리로 4년 3개월을 일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정권을 잡자마자 경제부총리제를 부활시킨 데는 고인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는 데 이견이 별로 없다. ‘근혜노믹스’(박 대통령의 경제철학)의 핵심 브레인으로 꼽히는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을 박 대통령에게 소개시킨 사람도 고인이다.
그에겐 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한국 현대경제사의 증인, 서강학파의 좌장, 개발경제의 주역….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시장경제의 핵심은 자유와 경쟁이다. 경쟁에는 승자와 패자,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가 있기 마련이다. 패자, 약자, 빈자를 보호하려고 승자, 강자, 부자를 무조건 때려잡는 것은 곤란하다.” 경제민주화 바람을 타고 ‘재벌 때리기’ 정서가 너무 확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표시였다. 행간에 고인의 경제관이 묻어난다.
‘화이부동’. 고인의 생전 좌우명이다. 논어에 나오는 ‘소인 동이불화 군자 화이부동’(小人 同而不和 君子 和而不同)에서 따왔다. 소인은 서로 같다면서 어울리지 못하고, 군자는 서로 다르지만 화합한다는 뜻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자고, 생전의 지암(남덕우의 호)은 무던히도 강조하고 주문했다.
방송정책을 어느 부처에 둘 것인가를 놓고 한 달 넘게 국정 파행을 자초했던 여야, 5년 만에 이뤄진 현직 대통령의 ‘5·18 기념식’ 참석을 노래 하나 때문에 반쪽짜리로 만든 국가보훈처, ‘좌빨’(좌익빨갱이) ‘우꼴’(우익꼴통) 등의 극단적 표현을 써가며 물어뜯는 이 땅의 논객들은 화이부동 메시지를 곱씹어볼 만하다. 경제관료나 경제학자로서의 그의 공과에는 이견이 있더라도 말이다.
안미현 논설위원 hyun@seoul.co.kr
그가 바로 ‘집(서울 화곡동 자택)을 짓다가’ 졸지에 불려 나가 경제관료가 된 남덕우씨다. 구순을 앞두고도 “컴퓨터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며 젊게 살던 그도, 매일 팔다리와 허리 관절을 좌우로 열 번씩 돌리며 건강관리에 철저했던 그도 세월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지난 18일 89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비판만 하지 말고 직접 와서 해 보라”며 대학 교수였던 그를 재무부 장관으로 발탁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고인을 ‘경제대통령’이라고 부르며 무한 신뢰를 보냈다. 재무장관 5년에 경제기획원장관 겸 경제부총리로 4년 3개월을 일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정권을 잡자마자 경제부총리제를 부활시킨 데는 고인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는 데 이견이 별로 없다. ‘근혜노믹스’(박 대통령의 경제철학)의 핵심 브레인으로 꼽히는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을 박 대통령에게 소개시킨 사람도 고인이다.
그에겐 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한국 현대경제사의 증인, 서강학파의 좌장, 개발경제의 주역….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시장경제의 핵심은 자유와 경쟁이다. 경쟁에는 승자와 패자,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가 있기 마련이다. 패자, 약자, 빈자를 보호하려고 승자, 강자, 부자를 무조건 때려잡는 것은 곤란하다.” 경제민주화 바람을 타고 ‘재벌 때리기’ 정서가 너무 확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표시였다. 행간에 고인의 경제관이 묻어난다.
‘화이부동’. 고인의 생전 좌우명이다. 논어에 나오는 ‘소인 동이불화 군자 화이부동’(小人 同而不和 君子 和而不同)에서 따왔다. 소인은 서로 같다면서 어울리지 못하고, 군자는 서로 다르지만 화합한다는 뜻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자고, 생전의 지암(남덕우의 호)은 무던히도 강조하고 주문했다.
방송정책을 어느 부처에 둘 것인가를 놓고 한 달 넘게 국정 파행을 자초했던 여야, 5년 만에 이뤄진 현직 대통령의 ‘5·18 기념식’ 참석을 노래 하나 때문에 반쪽짜리로 만든 국가보훈처, ‘좌빨’(좌익빨갱이) ‘우꼴’(우익꼴통) 등의 극단적 표현을 써가며 물어뜯는 이 땅의 논객들은 화이부동 메시지를 곱씹어볼 만하다. 경제관료나 경제학자로서의 그의 공과에는 이견이 있더라도 말이다.
안미현 논설위원 hyun@seoul.co.kr
2013-05-20 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