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구암고, 유일 ‘한인史 교과서’ 채택
中국제학교서 동포 도움 받은 교장 추진80명 수강… 징용·차별 등 수난사 돌이켜
한류·예술가·기업인 등 활약도 함께 다뤄
‘미나리’ 열풍·역사 왜곡 등 현재 이슈 연계
전 세계 750만 한인의 역사와 현재를 소개하는 ‘세계 한인 정치·경제사’ 교과서는 외교부의 지원을 받아 전북교육청 주관으로 개발돼 서울시교육청의 인정도서 승인을 받았다.
전북교육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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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한인 3세이자 인권운동가인 신숙옥씨가 한 토론 프로그램에서 일본의 역사 왜곡 문제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는 모습을 화면으로 보는 학생들의 눈이 반짝였다. 지난 6일 서울 관악구 구암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이 교사는 일본의 역사 왜곡 문제와 이를 바로잡기 위해 맞서는 재일 한인들의 노력을 주제로 수업을 이어 갔다. 이 교사는 “재일 한인들은 극우 세력들로부터의 인권 침해를 겪고 있지만, 일본의 시민사회와 손잡고 목소리를 내며 영향력을 높여 가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관악구 구암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이성대(오른쪽) 교사가 ‘세계 한인 정치·경제사’ 수업을 하고 있다.
구암고등학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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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교과서가 탄생하더라도 일선 학교에서 활용되려면 대상 학교를 선정하고 시도교육청의 인정도서 승인을 받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대상 학교 선정 과정에서 김대인 구암고 교장이 선뜻 나섰다. 김 교장이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중국 선양 한국국제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던 경험이 발판이 됐다. 당시 학교에는 중국 동포 기업인들이 십시일반 보내온 장학금이 모여들었다. 학교가 행정적인 문제에 부딪힐 때 동포들이 나서서 해결해 주는 일도 다반사였다. 김 교장은 “우리 학생들도 해외로 나가서 생활할 기회가 많을 텐데, 정착해 있는 한인들로부터 도움을 받게 될 것”이라면서 “학생들에게 세계 곳곳에 뻗어 있는 한인들과 연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학교 현장에 전례가 없는 과목을 가르치는 ‘맨땅에 헤딩’에 역사 교과를 가르치는 이 교사가 손을 들었다. 한국사와 세계사, 국제학 등에 관심 있는 3학년 학생 80여명이 ‘세계 한인 정치·경제사’ 과목을 선택했다. 수업은 조선 후기 간도와 연해주, 대한제국 시기 하와이와 멕시코의 농장으로의 이주를 시작으로 한인의 역사를 되짚는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의 강제징용과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 등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도 돌이킨다.
이 교사는 “한인의 역사를 접하다 보면 핍박받는 한인의 이미지만 떠올리기 쉽지만, 학생들은 세계 곳곳에서 활약하며 존경받는 한인들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인 백남준, 유한양행의 설립자인 유일한 등 위대한 업적을 남긴 한인들의 이야기도 접한다. 한인들이 각국에서 우리 문화를 지키고 알리며 한국의 발전에 기여하는 모습도 배운다.
구암고등학교는 일본, 대만 등 해외 학교들과 국제교류 활동을 통해 학생들의 세계시민 역량을 키운다. 2019년에는 케냐의 학생들이 학교를 찾았다.
구암고등학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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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당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다시 돌아오지 못한 ‘자이니치’에 대해 배우면서 이 과목의 존재 의미를 떠올렸어요. 우리나라에서든 해외에 나가서든 ‘민족’이라는 의식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3학년 박수빈양) 학생들은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떠올리는 동시에 ‘세계시민’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3학년 강예빈양은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한인들을 배우면서 ‘한국인’, ‘한반도’를 넘어 시각을 넓힐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 교사는 “한인들이 해외에서 겪었던 고난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나라에 사는 외국인들에게도 ‘역지사지’의 마음을 갖게 된다”면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차별 문제나 우리 사회의 다문화 현상, 인권 문제 등 세계시민으로서의 고민을 넓혀 갈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내 인종차별 문제에 맞서 재미 한인들은 학교 교과서에서 한인의 역사를 다루도록 목소리를 내고 있다.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주 교육위원회가 ‘한인 이민사’를 담은 인종학 수업 지도안을 승인하면서 캘리포니아주의 초·중·고교는 한인의 역사와 한류 열풍에 대해 배우게 된다. 우리나라 교육 과정에서 한인의 역사는 한국사 교과서의 일부분에서 소개된다.
김 교장은 “세계 각국에서 한민족의 영향력을 높이고 있는 750만 한인들의 이야기는 학생들에게도 의미가 클 것”이라면서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한인들을 통해 학생들도 세계시민으로서의 넓은 시야와 진취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2021-04-14 2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