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톡톡] 거짓말 일삼는 ‘리플리 증후군’… 부패한 나라 탓?

[사이언스 톡톡] 거짓말 일삼는 ‘리플리 증후군’… 부패한 나라 탓?

유용하 기자
유용하 기자
입력 2016-03-28 18:16
수정 2017-10-26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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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美 연구팀 상관관계 분석

안녕, 내 이름은 토머스 리플리, 사람들은 ‘거짓말쟁이 리플리’라고도 부르지.

내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55년 미국 여류 소설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1921~1995)의 ‘재능 있는 리플리씨’(The Talented Mr. Ripley)라는 작품 덕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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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리를 가장 먼저 영상으로 재현한 것은 1960년 프랑스 르네 클레망 감독이 알랭 들롱(오른쪽)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태양은 가득히’란 영화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제공
리플리를 가장 먼저 영상으로 재현한 것은 1960년 프랑스 르네 클레망 감독이 알랭 들롱(오른쪽)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태양은 가득히’란 영화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제공
난 충분히 능력도 있고 야망도 있지만 고아로 자라서 변변한 직업조차 갖지 못했어. 그래서 낮에는 피아노 조율사, 밤에는 호텔 벨보이로 하루하루를 버텨 내고 있었지. 하루는 마땅한 옷이 없어서 재킷 하나를 빌려 입었는데 프린스턴대 로고가 찍힌 것이었어. 때마침 호텔에 머물던 선박 재벌 그린리프씨가 자기 아들 디키도 프린스턴 출신이라고 하며 아는 척을 하길래 나도 잘 알고 있는 척해 줬지. 그랬더니 이탈리아에서 놀고먹는 아들을 데리고 오면 많은 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하더라고. 그때 느낌이 왔어. 선박왕의 아들을 죽이고 신분을 위조해서 내가 대신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말야.

영화판에서는 내 얘기가 꽤 매력적이었나 봐. 르네 클레망 감독이 1960년에 유명한 알랭 들롱을 주인공으로 해서 ‘태양은 가득히’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었고, 1999년에도 앤서니 밍겔라 감독이 맷 데이먼을 주인공으로 해서 리메이크했었지.
미국 예일대 연구팀이 159개 국가의 정치적 부패, 조세 포탈, 선거 부정 데이터를 수집해 국가별 ‘규칙 위반 수치’를 만들었다. 막대가 오른쪽으로 치우친 나라일수록 규칙 위반의 정도가 크고, 왼쪽으로 치우친 나라일수록 규칙위반 가능성이 낮다. 예일대 제공
미국 예일대 연구팀이 159개 국가의 정치적 부패, 조세 포탈, 선거 부정 데이터를 수집해 국가별 ‘규칙 위반 수치’를 만들었다. 막대가 오른쪽으로 치우친 나라일수록 규칙 위반의 정도가 크고, 왼쪽으로 치우친 나라일수록 규칙위반 가능성이 낮다.
예일대 제공
나처럼 성공에 대한 욕구는 강하지만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해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시달리다가 마음속으로 꿈꾸는 허구의 세계가 진실이라고 믿고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인격장애 증상을 ‘리플리 증후군’이라고도 하더군.

내가 거짓말을 일삼게 된 것은 성격 때문이기는 한데, 사회나 국가의 구조적 문제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어. 실제로 사람들이 거짓말을 얼마나 하느냐 하는 것은 살고 있는 나라에 좌우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 것을 봤거든. 정말이야, 거짓말이 아니라고.

세계적인 과학저널 ‘네이처’ 최신호에 실린 논문이었는데 영국 노팅엄대 시몬 게히터 교수와 미국 예일대 조너선 슐츠 교수가 함께 한 연구였어. 이 사람들에 따르면 ‘부패와 사기가 구조화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일수록 거짓말할 가능성이 높다’더라고.

힘 좀 쓴다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을 보면 사람들이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을 한다는 거야. 낙서와 쓰레기에 둘러싸여 사는 사람들일수록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버릴 가능성이 높다는 ‘깨진 유리창 가설’도 있잖아.

연구진은 159개국의 정치적 부패, 조세 포탈, 선거 부정 데이터를 수집한 뒤 이것들을 조합해 국가별 규칙 위반의 일상화 정도를 수치화한 다음 23개국에 직접 가서 대학생 또래들을 대상으로 개인의 정직성을 측정했더라고. 그 결과 규칙 위반 일상화 정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개인의 정직성도 떨어진다는 결론을 얻었다더군.

그런데 개인의 정직성 측정 대상자들 대부분이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대. 스스로 정직한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면서 적당한 거짓말로 실리를 챙기는 ‘정당화된 부정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더군.

연구자들은 특정 국가에서 부정행위가 만연하는 것은 경제적 불안정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지. 사회구조적 부패가 경제적 불안정이나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것 아니겠어. 제발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정책을 펼치는 사람들은 ‘나는 금수저, 은수저니까’라는 생각으로 제 잇속이나 챙길 생각은 그만하고 어떻게 하면 사회구조적 문제들을 해결할까 고민하는 건 어떨까 건의하고 싶군.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2016-03-29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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