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적인 사회를 향한 첫걸음 “차별금지법은 모두를 위한 법”

상식적인 사회를 향한 첫걸음 “차별금지법은 모두를 위한 법”

입력 2019-12-01 18:20
수정 2019-12-02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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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보기] 한국 인권 현주소와 차별금지법 제정 의미는

차별 없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시각장애인도 깔깔거리며 유행하는 TV 예능 프로그램을 볼 수 있고, ‘다문화 출신’ 유명인이 악플에 괴로워하는 일이 없는 사회. 학벌이 사라지고 학생들에게 더는 대학 입시가 인생의 전부가 아닌 시대. 입사원서에 포토샵으로 만들어 낸 얼굴과 성별을 박아 넣지 않고 다채로운 경험을 담는 시대. 피가 섞인 부모와 자식만을 가족으로 보는 대신 이해와 공감으로 뭉쳐 깊이 대화하며 사는 이들이 모두 가족으로 인정받는 사회.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지 않고, 가난 탓에 위축되지 않아도 되는 사회. 남남·여여 커플이 손잡고 길을 지나도 욕할 수 없는 사회. 이런 지향점을 담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 법이 상식적인 사회로 나가는 첫걸음이라고 강조한다. 일각의 주장처럼 ‘세상을 타락시킬 법’도, ‘일부만을 위한 법’도 아닌, 그저 모든 형태의 차별을 바로잡기 위한 기초를 쌓는 일이라는 것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주장하는 이들을 만나 한국 인권의 현주소와 차별금지법 제정이 어떤 의미인지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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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소수자들이 말하는 한국 사회의 인권 점수는 민망할 정도로 낮다. 전윤선 여행작가는 35점을 줬다.
사회 소수자들이 말하는 한국 사회의 인권 점수는 민망할 정도로 낮다. 전윤선 여행작가는 35점을 줬다.
휠체어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는 장애인 여행작가 전윤선(52)씨는 차별금지법이 추구하는 사회에 대해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소수 의견도 존중받는 사회”라고 말했다. 전씨는 “소수의 존재가 당연하게 무시당하지 않고 다양한 의견을 낼 수 있는 것이 진짜 민주주의 아니겠느냐”라고도 되물었다. 그는 2019년 한국의 인권 점수로 100점 만점에 35점을 줬다.

전씨는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차별이 만연하다”고 했다. 전국으로 여행을 다니며 장애인 차별을 목격한다. 그는 “식당에선 종업원이 안내하다가도 사장이 달려 나와 자리가 없다며 쫓아내기도 하고, 숙박업소에 장애인들끼리 간다고 하면 예약을 받아 주지 않는 곳도 많다”고 밝혔다. 또한 “지하철에 타면 일부 노인은 ‘장애인이면 그냥 집구석에나 있지 뭐하러 휠체어 타고 나와 사람을 불편하게 하느냐’고 대놓고 말한다”고도 했다.

그는 휠체어 여행 경험을 계기로 관광 약자 권익을 위한 단체 ‘한국접근가능한관광네트워크’를 2004년 만들었다. 하지만 한 단체만의 힘으론 역부족이다. 그는 “작은 민간업체 등의 차별 행위는 지방자치단체에 민원을 넣어 개선하도록 하고, 공공시설의 경우 국가인권위원회에 차별 진정을 낸다”면서 “하지만 정권마다 차별 여부 판단이 달라 지속성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전씨는 “노인 문제, 육아 등을 사회 문제로 바라보는 건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250만명의 등록 장애인은 여태껏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해 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얼마나 차별이 널리 퍼져 있기에 차별금지법이 나왔겠느냐”고 되물으며 “결국엔 차별금지법이 필요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서 차별금지법으로 하루빨리 사회 차별을 없애자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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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소수자들이 말하는 한국 사회의 인권 점수는 민망할 정도로 낮다. 정혜실 대표는 54점을 줬다.
사회 소수자들이 말하는 한국 사회의 인권 점수는 민망할 정도로 낮다. 정혜실 대표는 54점을 줬다.
정혜실 이주민방송(MWTV) 대표는 1994년 파키스탄인 남성과 결혼한 뒤 차별을 견디다 못해 시민운동에 뛰어들었다. 정 대표는 “차별금지법은 모든 사람이 동등한 인격체로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첫걸음”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의 인권 상황에 ‘54점’을 줬다. 다만 정치권과 종교계 그리고 언론계에는 ‘0점’을 줬다. 정 대표는 “10년 전과 비교해도 한국의 약자 혐오 수준은 악화일로에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 사회가 혐오 표현에 대해 강력하게 대응하지 않아 득세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한국 사회가 이주민을 모순적으로 대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한국 사회가 필요해 이주노동자를 불렀으면서도 이들을 범죄자처럼 대한다”고 지적했다. 또 “다문화를 혐오하는 댓글이 이자스민 전 의원 기사에 줄줄이 달리고, 불법체류 단속이라는 핑계로 이주노동자를 심각한 범죄인으로 내몰며, (반대 단체들이) 저 같은 사람을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난민반대공동운동이 길거리에 대형 스피커를 들고 나와 가짜뉴스로 사람들의 두려움을 조장하는 게 현실”이라고 밝혔다.

그는 차별금지법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사회 소수자를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하는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정 대표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현행법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개정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가정폭력방지법이나 성폭력예방법이 완전하지 않더라도 자기 규율 효과가 있듯, 포괄적 차별금지법도 이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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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소수자들이 말하는 한국 사회의 인권 점수는 민망할 정도로 낮다. 우주씨는 “마이너스 100점”이라고 답했다.
사회 소수자들이 말하는 한국 사회의 인권 점수는 민망할 정도로 낮다. 우주씨는 “마이너스 100점”이라고 답했다.
두 사람 이상을 동시에 사랑하는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연애) 개념을 받아들인 우주(이하 활동명·35)씨는 승은(30)씨와 지민(27)씨 셋이 함께 가족을 꾸렸다. 이들은 경기 모처에 집을 얻어 강아지 네 마리와 함께 산다.

우주씨는 대한민국의 인권 점수에 대해 “0점도 아깝다”면서 ‘마이너스 100점’을 줬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타인과 관계 맺고 가족을 구성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온갖 편견에 시달리고 소속된 집단에서 배제되는 일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우주씨는 “신성한 가족 형태를 더럽히고 파괴하는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들 취급을 당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함께 사는 지민씨는 ‘폴리아모리’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다니던 기독교 재단 대학에서 무기정학 처분을 받기도 했다.

우주씨는 한국 사회가 다양한 가족 구성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서로 에너지를 얻고 안락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꾸린 돌봄 공동체를 가족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그 개념이 확장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헌법은 성인 남녀 두 명의 혼인을 가족의 기본 전제로 하고, 민법에서는 혈족으로 규정한다”면서 “지금의 가족 및 주거 복지 정책은 주로 ‘정상 가족’을 중심으로 짜여 있기 때문에 우리 같은 가족은 혜택을 보기 어려울 뿐 아니라 의료결정권 침해나 친권, 상속의 문제도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우주씨는 “정부가 가족의 다양성을 언급하면서도 차별받는 우리 같은 가족들이 나서서 말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의 장조차 제대로 열어 주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차별금지법이 시행된 세상에 대해 “법이 도입된다고 곧바로 사회적 소수자를 차별하는 현실이 변할 것 같지는 않지만, 법적 보호 밖에 있는 가족들의 가족 구성 결정권이 인정받도록 하는 제도와 문화가 하루빨리 자리잡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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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소수자들이 말하는 한국 사회의 인권 점수는 민망할 정도로 낮다. 이종걸 사무국장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며 백지로 남겼다.
사회 소수자들이 말하는 한국 사회의 인권 점수는 민망할 정도로 낮다. 이종걸 사무국장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며 백지로 남겼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사무국장 이종걸씨는 차별금지법에 대해 “살면서 차별받지 않은 사람이 있느냐. 차별금지법은 특정 소수자가 아닌 모두를 위한 법”이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한국의 현재 인권감수성은 점수로 측정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이씨는 “차별금지법은 차별을 당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우리 사회의 공고한 차별 구조를 바꾸기 위해 모두가 노력하고 실천해야 하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씨는 “차별의 현실을 말하고 평등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크게 들리지 않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공적 발언권을 얻은 국회의원들이 소수자 혐오 발언을 쏟아 내고 있고, 정부·국회가 이에 대해 적극 대응하거나 조치하지 않아 사회적으로 그런 발언을 해도 되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일부 단체가 내뱉는 차별 혐오 발언을 공적 기관이 의견인 양 받아들이고 있어 각종 인권 관련법과 조례가 폐지되거나 철회되고 있다”고 규탄했다.

이씨는 소수자뿐만 아니라 모두가 인권을 말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그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 성소수자는 물론이고 남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조차도 학력·외모·가족 형태 등 차별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고 했다. 이어 “차별받는 당사자가 아무리 차별의 현실을 말한다고 해도, 국가와 사회가 함께 나서지 않으면 바뀌기 어렵다”며 “정부와 정치권, 언론, 시민사회, 시민들이 함께 행동하고 말하는 사회이길 바란다”고 밝혔다. 또한 “차별금지법 제정 이후에도 국가와 사회가 평등으로 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실천하는 행동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글 사진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고혜지 기자 hjko@seoul.co.kr
최영권 기자 story@seoul.co.kr

■ 포괄적 차별금지법

성별, 신체조건, 병력, 외모, 나이, 인종, 혼인 여부, 성 지향성, 임신 또는 출산, 가족 형태 및 가족 상황, 종교, 학력, 사회적 신분 등 생활 모든 영역에서 합리적인 이유 없는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이다. 유엔은 2009년과 2017년 두 차례에 걸쳐 대한민국 정부에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했다. 국내에서는 제17대 국회 때 처음 발의된 후 새 국회가 구성될 때마다 발의됐으나 반대 여론 탓에 최종 처리되지 못하고 폐기됐다. 보수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일각에서는 이 법이 ‘동성애를 조장한다’거나 ‘사회 규칙을 망가뜨린다’는 이유로 강력한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최근 악플·혐오 표현 등 약자 혐오 문제가 두드러지며 인권단체들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시급히 도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2019-12-02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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