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의 관념화, 국민 정체성 길잡이

국토의 관념화, 국민 정체성 길잡이

손원천 기자
손원천 기자
입력 2023-09-08 02:01
수정 2023-09-08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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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만드는 사람/설혜심 지음/휴머니스트/432쪽/2만 5000원

제작자마다 다르게 국토 표현
‘모국’ ‘아버지의 땅’ 단어 접목
국가 향한 ‘충성의 감정’ 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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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바스티안 뮌스터가 1588년에 제작한 여성화된 유럽 지도. 유럽 대륙을 여성의 몸으로 파악하는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휴머니스트 제공
제바스티안 뮌스터가 1588년에 제작한 여성화된 유럽 지도. 유럽 대륙을 여성의 몸으로 파악하는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휴머니스트 제공
지도는 현실에 대한 선택적 표현이다. 지도가 그려 내는 주제 역시 지도 제작자의 선택을 반영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같은 공간이라도 지도에선 표현하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려진다. 읽는 사람 역시 자신의 세계관을 통해 지도의 기호를 해독한다. 따라서 지도는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에게 포착된 세계의 개념이며, 상(image)이다.

지도는 ‘국민’의 개념 확립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도 만드는 사람’은 국민국가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지도의 의미를 근대 초 영국의 사례를 들어 분석한 책이다. 지도가 국민 정체성 확립의 길잡이 노릇을 했다는 독특한 주장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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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특히 관심을 갖는 분야는 ‘역사지지서’(歷史地誌書·특정 지역의 자연 및 인문 현상을 시기에 따라 백과사전식으로 나눠 기술한 책)다. 고대에 존재했지만 중세 때 시간의 흐름을 강조하는 연대기가 등장하면서 무시되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부활했다. 그러다 근대의 과학적 역사가 등장하면서 다시 역사학의 뒷전으로 밀렸고, 가까스로 지리학의 영역에 편입됐지만 이번엔 옛 지지가 해 온 역할과 유산이 실종되며 변방에 머무르고 만다.

전공인 영국사를 중심으로 역사지지서를 복원하려던 저자는 부활의 시점이 영국에서 국민국가가 탄생한 시기와 일치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유럽에서 인본주의를 받아들인 영국은 자신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 과정에서 국토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도 만들었다. 지도 제작 사업은 국가나 국민의 정체성에 이바지하게 됐고, 지리교육은 이데올로기 학습의 성격을 띠게 됐다.

현실이 지도를 모방하기도 한다. 16세기 절대군주 헨리 8세의 신하였던 존 릴런드는 영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답사기와 지도를 남겼다. 영국이란 공간을 역사라는 시간의 흐름과 처음으로 접목한 것이다. 지배 왕조는 이를 국민통합 도구로 활용했다. 지도와 지지서 편찬이 국기, 국가, 국어 등에 못지않게 국민을 문화적으로 통합하는 요소로 기능했다는 뜻이다.

관념화된 공간은 지리적이거나 물리적이기보다 어떤 감정적인 것이 돼 국토에 대한 정서적 감정이 배양될 수 있게 만든다. ‘모국’, ‘아버지의 땅’과 같은 단어들이 국토에 접목되는 것이다. 이제 국토에 대한 침범은 자신이나 가족에 대한 침해와 동일시된다. 동시에 국가는 충성의 감정을 유도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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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우가 1635년에 제작한 ‘새 아틀라스’ 속 유럽 지도. 지도 위에 유럽의 도시를 그리고 양쪽 가장자리에 각 도시를 표상하는 남녀 한 쌍을 넣었다. 다만 이탈리아 베네치아(왼쪽 아래)만 남자 두명으로 표시됐다. 이는 베네치아가 남색의 도시란 걸 암시한 것인데, 이렇게 형성된 지리적 관념은 큰 파급력과 지속성을 띠게 된다.  휴머니스트 제공
블라우가 1635년에 제작한 ‘새 아틀라스’ 속 유럽 지도. 지도 위에 유럽의 도시를 그리고 양쪽 가장자리에 각 도시를 표상하는 남녀 한 쌍을 넣었다. 다만 이탈리아 베네치아(왼쪽 아래)만 남자 두명으로 표시됐다. 이는 베네치아가 남색의 도시란 걸 암시한 것인데, 이렇게 형성된 지리적 관념은 큰 파급력과 지속성을 띠게 된다.
휴머니스트 제공
지도는 종종 젠더를 빌려 주체와 객체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우월한 정신세계엔 남성성이, 열등한 물리적 공간에는 여성성이 부여되곤 했다. 유럽 전체를 여성의 몸으로 파악한 ‘여성화된 유럽 지도’(1588)는 이런 경향을 잘 보여 준다. 블라우의 ‘새 아틀라스’(1635)는 유럽 지도 양옆에 유럽의 각 도시를 상징하는 남녀 한 쌍을 배치했는데, 이탈리아 베네치아만 남자 둘을 그려 넣었다. 베네치아가 남색의 도시란 걸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지리적 관념은 놀라울 만큼 지속성과 파급력을 갖게 된다.

2023-09-08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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