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가루 식품 조절로 건강 지키려면
팔·다리는 가는데 배만 나온 전형적인 복부비만 체형이었던 직장인 이경수(43)씨는 2년 전 밀가루와 작별하고서 극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즐겨 먹던 튀김, 빵, 라면을 멀리하자 35인치였던 허리가 33인치로 줄었고 몸무게도 덩달아 7㎏이 빠졌다. 특별히 운동이나 다른 다이어트를 병행하진 않았다.단지 밀가루 섭취만 줄였는데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했을까. 과연 밀가루는 멀리해야 할 곡물일까. 밀가루는 인류가 수천 년에 걸쳐 먹어왔으며, 지금도 세계 인구 3분의2가 주식으로 삼고 있다. 이미 식품의 안전성 측면에서는 검증된 곡물이다. 최근 밀가루에 함유된 단백질인 글루텐 유해성 논란이 제기되면서 장내 염증과 소화장애를 일으키는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지만 의료계는 크게 문제가 되는 성분이 아니라고 말한다.
●한국인 밀가루 섭취 늘지만 셀리악병 증가 없어
글루텐 섭취 문제로 발생하는 대표적인 질환이 ‘셀리악병’인데 한국인은 셀리악병과 관련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드물어 이 병에 걸릴 위험이 극히 적다는 것이다. 셀리악병은 글루텐에 면역체계가 과민반응을 일으키는 자가면역성 알레르기 질환으로, ‘HLA-DQ2’라는 유전자에 의해 생긴다. 복부 통증, 식욕 부진, 설사, 복부 팽만감이 나타나는 소화기계 질환이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밀을 주로 먹는 서양인의 5%가 이 병을 앓고 있고, 미국 전체 인구의 6%가 밀 알레르기로 고통받고 있다. 한국인의 밀가루 섭취량도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이지만 국내에서 셀리악병 발병이 증가하고 있다는 연구 보고는 없다. 하지만 한의계는 밀가루의 찬 성질이 위장 장애를 일으키는 원인일 수 있다고 얘기한다. 특히 체질적으로 소화 기능이 약한 사람과 따뜻한 기운이 약해 몸이 차가워지기 쉬운 소음인은 밀가루를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김고운 강동경희대병원 한방재활의학과 교수는 13일 “찬 성질의 음식은 특히 몸이 찬 사람의 대사를 방해하고 소화 장애나 설사를 일으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보리도 밀과 마찬가지로 성질이 차다. 소음인 체질은 평소 소화 기능을 돕고 몸을 따뜻하게 하는 음식을 섭취해야 하는데, 성질이 맵고 따뜻한 찹쌀·닭고기·장어·마늘·감자·부추·사과·귤과 계피차·생강차·꿀차 등이 좋다.
김 교수는 “실제로 소화가 잘 안 되는 환자에게 밀가루 끊기를 권했는데 증상이 호전됐다는 환자가 많았다”며 “소화 장애가 있는 환자 외에도 알레르기가 있거나 체중 감량이 필요한 환자에게도 밀가루 끊기를 권하고 있다”고 말했다.
복부 비만과 밀가루의 연관성은 비교적 명확하다. 정제된 탄수화물이 주범이다. 정제된 탄수화물은 정제되지 않은 일반 탄수화물보다 우리 몸에 훨씬 빨리 소화·흡수돼 혈당을 급격히 올린다. 이때 우리 몸은 혈당을 낮추려고 인슐린을 과다하게 분비한다. 이 과정에서 일시적인 저혈당 증세가 나타나고, 공복감을 느껴 혈당을 빨리 올릴 수 있는 탄수화물을 더 찾게 된다. 저혈당과 고혈당을 오르내리며 탄수화물을 탐닉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췌장에서 분비되는 인슐린은 당의 흡수를 촉진하는 것 외에 아미노산인 트립토판을 두뇌로 운반하는 역할도 한다. 두뇌로 전달된 트립토판은 기분을 좋게 하는 신경전달 물질인 ‘세로토닌’ 분비를 촉진한다. 세로토닌이 감소하면 우울, 의욕 상실, 초조함 등의 금단현상이 오기 때문에 뇌는 더 많은 탄수화물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 몸은 서서히 단맛에 길들어지고, 당연히 당뇨병과 비만 같은 합병증이 온다. 대표적인 정제 탄수화물인 밀가루 섭취만 줄였는데 이씨의 복부 비만이 사라진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열량 높은 밀가루 음식 단품 섭취로 영양 불균형
정인경 강동경희대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밀가루 음식 안의 첨가물이 건강을 해친다”고 말했다. 그는 “밀가루 자체가 나쁘기보다는 밀가루 음식 대부분의 열량이 높은 게 문제”라면서 “같은 밀가루 음식이더라도 건강하게 조리된 것을 먹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예컨대 짜장면 1인분의 열량은 약 700㎉, 국물 라면은 500㎉ 수준이다. 성인 기준 1일 권장열량이 남성 2200~2600㎉, 여성 1800~2100㎉l인 점을 생각하면 두 끼만 짜장면과 라면으로 때워도 하루 권장열량의 상당량을 섭취하게 된다. 밀가루 음식이라고 해서 밀가루로만 이뤄진 식품은 드물다. 버터, 나트륨, 설탕 등을 함께 먹게 된다. 밥을 먹을 땐 채소와 고기 등 다양한 영양소가 든 반찬을 같이 먹지만, 밀가루 음식은 주로 단품으로 먹기 때문에 균형 잡힌 영양 섭취가 어렵다. 김은희 서울아산병원 건강의학과 교수는 “탄수화물 중독에서 벗어나려면 혈당 지수가 낮은 음식으로 식단을 바꿔야 한다”며 “혈당 지수가 낮으면 천천히 소화되기 때문에 급격한 인슐린 분비를 예방하고 쉽게 배고파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또 “필요한 열량 중 탄수화물 비율을 낮추고 단백질 섭취를 늘리는 것도 좋다”고 강조했다.
●실천 가능한 기준 정하고 밀가루 섭취 줄여야
밀가루 끊기 도전은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2년째 밀가루를 멀리하는 이씨도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성공했다. 처음에는 밀가루가 들어간 소스까지 찾아 철저히 따져보고 아예 입에 대지 않았다. 하지만 사흘 만에 실패했다. 밀가루 섭취를 완벽하게 끊으려다 보니 그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한 달 뒤 튀김, 우동, 빵, 라면 끊기에 다시 도전했다. 이후 9개월간 적어도 다섯 번은 몰래 숨어 튀김옷이 바삭거리는 돈가스를 먹어 치웠다. 다만 밀가루와 싸우기보다 실천 가능한 선을 정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하기로 했다. 그러자 밀가루의 유혹이 시큰둥해졌다. 피로감도 줄었고, 폭음하는 습관도 없어졌다. 먹을 수 있는 안주가 적다 보니 자연스럽게 술을 줄이게 됐다.
이씨는 “사람의 몸은 신비해서 한 숟가락을 줄이면 한 숟가락만큼의 긍정적 변화가 일어나더라”며 “1주일에 한 번 먹던 라면을 2주에 한 번으로 줄여도 변화가 있었다. 밀가루는 끊는 게 아니라 평생 관리하는 것”이라고 웃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2019-01-14 2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