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추기경은 연명 치료를 거부했으며 90세라 장기 기증이 어렵다고 판단돼 선종 직후 안구 적출 수술이 진행됐다. 그는 “모두 감사합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행복이 하느님의 뜻입니다”를 마지막 말로 남기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명동밥집에 1000만원을 전달하고 음성 꽃동네와 예비신학생들, 아동 신앙교육을 위해 기부하는 등 가진 것을 모두 나눈 뒤였다. 공교롭게도 어제 고(故) 이건희 회장의 유산 30조원 가운데 60%를 사회에 환원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옴니버스 옴니아의 정신에 어느 쪽이 더 부합하는지는 판단해 볼 일이다.
염수정 추기경은 ‘김수환 추기경이 한국 천주교회의 아버지였다면 정 추기경은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고 돌아봤다. 밖으로는 교회법 전문가로 세상사에 이렇다 할 목소리를 내지 않은 것처럼 비쳤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2009년 서울 뉴타운 개발에 대해 “돈보다 사람”이라고 말하거나 쌍용차 파업, 용산 참사, 이듬해 세월호 참사 때 시류를 좇지 않고 목소리를 냈다.
또 생명 윤리에 관심이 깊어 2005년 황우석 교수의 배아 줄기세포를 하나의 생명으로 봐 반대하고 황 교수와 나눈 논쟁은 상당한 화제가 됐다. 서울대교구가 성체 줄기세포 연구에 100억원을 투자한 것도 어린 시절 과학자, 화학자를 꿈꾸고 평소에도 많은 책을 읽어 과학과 연구 윤리에 조예가 깊은 그의 영향이었다.
2009년 김 추기경, 이듬해 법정 스님에 이어 정 추기경처럼 영적 지도자들이 세상을 떴다. 교회를 세습하는 이들이 적지 않고 재벌기업의 세습도 여전하다. ‘영끌’(영혼까지 끌어당긴 투자)이 자주 입에 오르내린다. 주식이나 부동산, 가상화폐 광풍에 휩쓸리는 젊은이들에게 이들의 검박한 삶이 작지 않은 울림으로 전해지길 바란다.
bsnim@seoul.co.kr
2021-04-29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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