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아산의 외암마을에는 16세기부터 예안 이씨가 모여 살았다고 한다. 지금처럼 외암마을로 불리게 된 것은 아무래도 조선 후기 대표적인 유학자의 한 사람인 외암(巍巖) 이간(李柬·1677~1727)의 명성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외암(外岩)마을이라고 쓰는 것은 일제강점기 표기를 간편하게 한다며 이름을 고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외암마을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잠정 목록에 올랐다.
호서 성리학은 율곡 이이를 비롯한 기호학파의 학맥을 이어받았다. 그런데 18세기에 접어들어 호서 학맥은 호론(湖論)과 낙론(論)으로 분리된다. 호론을 주장한 사람이 남당 한원진이었고, 낙론을 주장한 사람이 바로 외암 이간이었다. 두 사람 모두 우암 송시열의 학통을 이어받은 한수재 권상하의 문인이었다.
호락 논쟁이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은지 다른지가 핵심이었다. 한원진은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고 했지만, 이간은 인성과 물성은 같은 것이라고 다른 견해를 폈다. 두 사람 모두 호서 출신이지만 호서 유학자들이 한원진에, 서울 주변(下) 유학자들이 이간에 동조하면서 각각 호론과 낙론이라고 했다.
외암마을은 설화산이 뒤를 감싸고 반계라는 이름의 작은 시내가 앞으로 흐른다. 하지만 북쪽 산과 남쪽 시내의 전형적 배산임수가 아닌 동쪽 산과 서쪽 시내의 형태이다. 마을의 집을 대부분 서남향으로 지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노출되는 마을 북서쪽에는 모자라는 자연조건을 인위적으로 보완하는 비보(裨補) 숲을 조성했다.
외암마을은 마을 어귀에서 종가(宗家)에 이르는 안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자리잡고 있다. 안길 양쪽에는 각각 큰 집을 중심으로 중·소 규모 집들이 한데 어울려 있다. 남쪽 영역의 큰 집이 참판댁이라면 북쪽 영역의 큰 집이 건재고택이다. 건재고택은 건재(建齋) 이상익(李相翼)이 19세기 후반기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지었다고 한다. 건재가 영암군수를 지낸 만큼 영암댁(靈岩宅)이라고도 불린다.
중요민속자료인 건재고택은 소유권이 2009년 미래저축은행으로 넘어가는 불운을 맞는다. 수백억원의 고객 돈을 빼돌리고 밀항을 시도하다 붙잡힌 김찬경 당시 미래저축은행 회장은 이 집을 술판을 벌이는 접대 장소로 이용했다. 결국 경매에 넘겨졌지만, 살 사람은 없었다.
건재고택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매입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환영하는 목소리가 크지만 생각해 볼 문제도 있다. 옛집은 국가나 지자체가 사들이는 순간 애물단지가 된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훼손이 빨라지고 관리 인력도 필요하니 예산 먹는 하마가 된다. 사람이 실제로 거주하는 민속마을이라는 가치도 퇴색할 것이다. 매입이 불가피하다면 집에 애정을 가진 사람이 살면서 관리하도록 하는 방안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호서 성리학은 율곡 이이를 비롯한 기호학파의 학맥을 이어받았다. 그런데 18세기에 접어들어 호서 학맥은 호론(湖論)과 낙론(論)으로 분리된다. 호론을 주장한 사람이 남당 한원진이었고, 낙론을 주장한 사람이 바로 외암 이간이었다. 두 사람 모두 우암 송시열의 학통을 이어받은 한수재 권상하의 문인이었다.
호락 논쟁이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은지 다른지가 핵심이었다. 한원진은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고 했지만, 이간은 인성과 물성은 같은 것이라고 다른 견해를 폈다. 두 사람 모두 호서 출신이지만 호서 유학자들이 한원진에, 서울 주변(下) 유학자들이 이간에 동조하면서 각각 호론과 낙론이라고 했다.
외암마을은 설화산이 뒤를 감싸고 반계라는 이름의 작은 시내가 앞으로 흐른다. 하지만 북쪽 산과 남쪽 시내의 전형적 배산임수가 아닌 동쪽 산과 서쪽 시내의 형태이다. 마을의 집을 대부분 서남향으로 지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노출되는 마을 북서쪽에는 모자라는 자연조건을 인위적으로 보완하는 비보(裨補) 숲을 조성했다.
외암마을은 마을 어귀에서 종가(宗家)에 이르는 안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자리잡고 있다. 안길 양쪽에는 각각 큰 집을 중심으로 중·소 규모 집들이 한데 어울려 있다. 남쪽 영역의 큰 집이 참판댁이라면 북쪽 영역의 큰 집이 건재고택이다. 건재고택은 건재(建齋) 이상익(李相翼)이 19세기 후반기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지었다고 한다. 건재가 영암군수를 지낸 만큼 영암댁(靈岩宅)이라고도 불린다.
중요민속자료인 건재고택은 소유권이 2009년 미래저축은행으로 넘어가는 불운을 맞는다. 수백억원의 고객 돈을 빼돌리고 밀항을 시도하다 붙잡힌 김찬경 당시 미래저축은행 회장은 이 집을 술판을 벌이는 접대 장소로 이용했다. 결국 경매에 넘겨졌지만, 살 사람은 없었다.
건재고택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매입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환영하는 목소리가 크지만 생각해 볼 문제도 있다. 옛집은 국가나 지자체가 사들이는 순간 애물단지가 된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훼손이 빨라지고 관리 인력도 필요하니 예산 먹는 하마가 된다. 사람이 실제로 거주하는 민속마을이라는 가치도 퇴색할 것이다. 매입이 불가피하다면 집에 애정을 가진 사람이 살면서 관리하도록 하는 방안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2015-11-18 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