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국제시장’ 표준근로/진경호 논설위원

[씨줄날줄] ‘국제시장’ 표준근로/진경호 논설위원

입력 2015-01-28 17:54
수정 2015-01-2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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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만 관객 영화 ‘국제시장’이 박수를 받는 또 다른 이유는 지금 정부가 반기고 있듯 ‘법대로 만든 영화’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주연 황정민·김윤진씨는 물론 윤제균 감독에서부터 말단 스태프까지 제작에 참여한 모두가 근로표준계약서를 썼고, 영화 제작도 계약서가 준용한 근로기준법에 맞춰 이뤄졌다. 우리 영화로는 처음 있는 일이다. ‘하루 12시간 이내 촬영’, ‘초과촬영 추가수당 지급’, ‘주1회 휴무’, ‘4대 보험 가입’이라는 표준계약을 따르느라 야간 촬영을 최소화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쉬었고, 약속한 임금도 때에 맞춰 꼬박꼬박 지급했다고 한다.

이렇게 표준계약을 이행하느라 들어간 돈은 3억원…. 통상적인 주연급 배우 한 명의 개런티에도 못 미치는 ‘푼돈’이건만 왜 지금껏 한국 영화계는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의 표현을 빌려 ‘영화가 만들어질 때까지 모두가 행복할’ 이 표준계약서 하나 변변하게 만들지 못했던 것인지 안타깝고도 다행스럽기 그지없다. 윤 감독이 얼마 전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만큼 막내 스태프까지 인센티브를 지급하겠다”고 했다니 ‘국제시장’ 주변의 웃음꽃은 당분간 더 이어질 모양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영화산업의 지난 몇 년은 커다란 아픔 몇 가지가 하나씩 하나씩 희망의 꽃을 피운 시기였다. 굶주림으로 몸져 누운 채 위층 세입자에게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을까요”라는 쪽지를 남기고는 그만 서른둘의 생을 접고 만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의 죽음은 이듬해인 2012년 예술인복지법이라는 이름의 ‘최고은법’을 낳았다. 그리고 이 법으로 만들어진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은 올해 처음 110억원을 투입해 제2, 제3의 최고은 돕기에 나섰다. 2011년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처음 300만명 가까이 관객을 모은 ‘워낭소리’가 남긴 씁쓸한 뒷얘기는 지금 500만 관객 동원을 눈앞에 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주도면밀한 사전 준비를 가능케 했다. 예상치 못한 흥행 앞에서 제작사와 감독이 수익 배분을 놓고 벌인 소송전을 보면서 ‘님아’ 제작진은 영화 촬영에 앞서 철저하게 수익 배분 원칙을 세웠다.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인해 워낭소리 주인공 할아버지가 곤욕을 치렀던 것과 달리 ‘님아’ 제작진은 개봉 직후 주인공 할머니를 보호(?)하기 위해 자식들 집으로 모셨다. 대박을 ‘법대로’ 만들 줄 알고, 뜻밖의 행운을 세련되게 요리할 줄 아는 성숙함을 우리 영화계가 갖춰 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갈 길이 멈춘 건 아니다. 어제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상영된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 시위하듯 지금도 중소 제작사들의 많은 영화들은 몇몇 대형 배급사들의 스크린 독점에 신음하고 있다. ‘문화가 있는 날’인 어제 ‘국제시장’을 찾은 박근혜 대통령이 다음달 ‘개를 훔치는 방법’을 완벽하게 터득할 기회까지 잡을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는 얘기다.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2015-01-29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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