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광장] ‘대한 청구권’처럼 준비했을까?/이지운 논설위원

[서울광장] ‘대한 청구권’처럼 준비했을까?/이지운 논설위원

이지운 기자
입력 2019-08-08 17:36
업데이트 2019-08-09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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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운 논설위원
이지운 논설위원
청구권(請求權)이 우리가 일본에 요구할 것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일본 측의 ‘대한(對韓) 청구권’이란 게 있었다. 참 어이없다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이 문제로 일본에 한참을 시달렸다. 전쟁통에도 일본과 마주 앉아야 했던 1951~1952년 1차 한일회담 테이블을 뒤엎은 건 대한 청구권 문제였다.

우리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 것이라는 건 당연한 일이고, 일본 패망 후 결론도 그렇게 났다. 1945년 9월 20일 남쪽에 설치된 미 군정청은 12월 6일 발표한 ‘법령 33호’를 통해 한반도 내 일본인 재산권 취득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다. ‘제2조 1945년 8월 9일 이후 일본 정부, 그의 기관 또는 당해 국민, 또는 … 이 소유 관리하는 … 모든 종류의 재산 및 수입에 대한 소유권은 1945년 9월 25일부로 미 군정청이 취득하고 소유한다’는 내용이다.

일본은 반발했다. 1907년 헤이그조약 46조의 ‘사유재산은 몰수할 수 없다’는 규정을 근거 삼아 한반도 내 일본인 재산의 반환을 주장했다. 그리고 패망 직후부터 이를 대비했다. 해방 후 채 보름도 안 된 1945년 8월 27일 조선총독부는 종전사무처리본부를 설치하고 ‘일본인의 조선 내 기업경영, 소유재산, 조선인에 대한 채권채무, 투자’ 등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 재산으로 한국의 대일 청구를 상쇄하고 연합국 배상에도 충당하려 했다. 집계 결과 해방 시점 일본의 한반도 내 재산은 702억여엔. 당시 환율로 대략 47억 달러였다.

다행스러운 건 한국도 일본인들의 치를 떨게 한 무기를 개발한 것이었다. 1952년 대통령 선언으로 확정한 ‘이승만 라인’ 또는 ‘평화선’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이 설정한 일본 해역보다 더 일본 쪽으로 선을 긋고 영해로 선언해 버린 것이다. 본회담 개시 1개월 전이다. 이종원 일본 와세다대 한국학연구소장은 1994년 논문에서 “한일회담에서 미국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그에 대체되는 유리한 교섭재료를 만들어 내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본을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는 미국이, 한국이 일본에 대해 과도한 요구를 하고 있다고 보고 한국을 억제하려던 시점이었다”고 보았다.

1953년 2차 한일회담은 어업 문제에서 결렬됐다. 당시 일본 외무성에는 이승만 라인의 철폐를 조건으로 대한 청구권을 포기할 생각도 있었다 하니, 참으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모양이다. 한국이 이승만 라인을 침범한 일본 어선을 ‘마구잡이’로 나포하고 있다며 일본 국회에서는 미군의 출동을 요구하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아이젠하워 전 미 대통령이 1954년 미국을 찾은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라인의 철폐를 요구하자 이 전 대통령은 아예 회담을 결렬시켜 버린다. 귀국하자마자 일본 어선의 나포를 강화했으며, 일본과의 경제 단교 조치를 내리기에 이른다.

대한 청구권은 대략 이즈음 소멸의 길을 걷는다. ‘구보타 망언’으로 종료된 3차 한일회담 이후 휴지기를 거치며 일본에서 청구권의 포기가 거론된다. 우리 협상력의 결과물이면 좋았으련만 그렇지는 않았다. 일본 경제는 한국전 특수로 펄펄 끓으면서 1950년대 중반도 못 돼 전쟁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고 고도성장 단계로 진입했다. 청구권을 논하느니, 한국으로 경제 진출을 꾀하는 편이 이득이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경제력을 회복하고 국제 정세에 힘입은 일본은 회담 중재에 나선 미국의 압박을 여러 차례 물리치기도 했다.

대한 청구권 논란은 국가 간 갈등과 논쟁을 대비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걸 보여 준다. 일본 대장성은 1차 요시다 내각 아래 1946년 9월 대장성 관리국 부속기관으로 ‘재외재산조사회’를 설치해 297명을 동원,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관한 역사적 조사’라는 극비 또는 취급주의 문서를 대량으로 만들어 낸다. 35권짜리 책으로 인쇄돼 보관된 것 가운데 조선편이 10권이다. 뒤에 피징용자 협상중 일본이 한국 측에 숫자의 근거를 제시하라고 강요하며 “피해자 명부가 있느냐”고 비아냥댔을 때 우리 협상단은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언필칭 ‘전쟁 중’이라 하니 따져 보게 된다. ‘대한 청구권’처럼 준비했을까? 일본에도, 우리에게도 적용해 볼 일이다. 또 하나 짚을 게 있다. 오늘날의 ‘이승만 라인’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당시 이것으로 대략 300여척의 일본 선박을 나포했고, 4000명가량의 일본인 선원들이 옥고를 치르거나 구금 조치됐다. 1965년 최종 한일협정 조인 때까지 살아남아 일본을 괴롭혔다. 끝으로 미국, 그리고 국제 정세의 변화가 당시에도 고비마다 협상을 좌우지했음도 기억해야 한다.

jj@seoul.co.kr
2019-08-09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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