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규 편집국 부국장
사실 무척 궁금했었다. 소위 대한민국에서 안 되는 것이 없다는 그래서 ‘삼성공화국’이라는 말까지 낳았던 삼성이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게 여론이기에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그냥 밀어붙일 것 같기도 하고, 서슬퍼런 정권 초니까 혹시 꼬리 내리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전에 출입기자의 ‘메모’가 없었더라면 이 사장의 브리핑을 뜨거운 이슈에 대해 이해를 구하고 해명하는 정도로 짐작했을 게다. 그런데 삼성은 삼성답지 않게 화끈하게 백기를 들었다. 차별과 서열화라는 공세가 좀 버거워 보였지만 버텨주길 바라는 사람 또한 적지 않았다고 본다. 그러나 삼성은 덫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꽁꽁 옭아맨 그물을 단칼에 베는 식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런 장면을 본 어떤 세력은 속이 시원했을지 모르고, 삼성 역시 이 정도 상처가 다행이라며 한숨 돌렸을지 모른다. 이 사장의 말을 빌리면 총장추천제로 삼성이 고르고 싶은 인재는 훌륭한 ‘인성’의 소유자다. 희생정신과 봉사활동이란 리더십으로 무장한 청춘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는 화려한 스펙과는 거리가 멀다.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이 아니어도 괜찮다. 삼성에 들어가고자 한 해 20만명이 우르르 몰리지만 그중에서 이런 싹수 있는 젊은이를 찾기 어렵다는 게 고민이었다. 삼성도 그렇고 현대차도 마찬가지지만 대기업 임원을 만나보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다. 공부 잘한다고 일 잘하는 것은 아니라고. 삼성 임원에 SKY 출신보다 지방대와 중위권 대학 출신이 많은 근간은 조직에 대한 로열티다. 일단 뽑아주기만 하면 앞뒤 안 가리고 죽을 둥 살 둥 일하는 쪽은 학벌 비주류란다.
그러나 삼성의 총장추천제 포기를 단순히 삼성만의 일로 볼 일이 아니다. 총장추천제 도입이 삼성 쪽에서 보면 로열티가 충만한 사람이 필요해서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소소한 것에 불과하다. 정작 큰 것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허물 수 있는 단초를 놓쳤다는 점이다. 그동안 우리는 크고 작은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인성, 인성 외쳤지만 그때마다 공허한 메아리로 그친 게 사실이다.
잘 먹고 잘살려면 열심히 공부해라. 다른 사람을 이겨야 네가 산다. 이렇게 자식들을 가르치고 다그친 게 우리들이다. 공부보다 싹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면서도 자식들이 공부 안 하고 친구들과 쏘다닐까봐 내심 불안했던 게 우리들의 모습이다. 삼성이 인성을 중시한다고 해서 공부하지 말라고 할 부모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부도 좋지만 친구들과 잘 지내야 한다거나 손해 볼 줄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계기가 될 수는 있었다. 그것은 일대 변화다. 그런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 아프다. 백지화가 아니고 유보라 했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가 사라졌다고들 한다. 비주류가 주류사회에 진입할 수 있고, 사회적 약자가 강자가 될 수 있는 그런 대한민국을 보고 싶다.
ykchoi@seoul.co.kr
2014-03-18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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