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횡성 가을 나들이
가을이 시나브로 깊어 갑니다.북적대는 본격 단풍철보다 외려 요즘이 나들이하기에 더 낫지 싶습니다.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오지의 풍모를 가진 곳을 찾는다면 강원 횡성이 어떨까요.
봉황의 울음소리 들린다는 봉명폭포까지 짧은 산행을 즐겨도 좋겠고, 백덕산의 옛 42번 국도를 따라 산길 드라이브를 즐겨도 좋겠습니다.
안 가면 손해인 태기산, 물안개로 수채화 같은 풍경을 펼쳐내는 횡성호도 있지요.
이른 아침에 마주한 횡성호 포동교 주변 풍경. 물안개가 호수와 주변 산자락을 희롱하듯 감싸 안고 있다. 물안개는 오전 9시를 전후해 대부분 사라진다.
봉황의 울음소리 들린다는 봉명폭포.
폭포의 들머리는 고라데이 마을이다. 고라데이는 골짜기란 뜻의 사투리다. 오래전엔 한국전쟁도 모르고 지낼 만큼 오지였다는 마을이다. 이런 곳이 서울에서 불과 1시간 40분 남짓한 거리에 있다는 게 놀랍다. 도로가 사통팔달로 뚫린 요즘엔 알음알음 찾는 도시인을 상대로 화전민, 심마니 등 산촌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폭포로 오르는 길섶은 야생화 천지다. 벌개미취가 어린아이 이처럼 가지런한 꽃잎을 선보이고, 물봉선과 산괴불주머니 등도 뒤질세라 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숲에 들면 곧 휴대전화가 불통이다. 그러니 휴대전화 배터리를 아낄 요량이라면 숲에 들기 전에 전원부터 꺼 둘 일이다.
제비 닮은 명맥새가 슬피 울었다는 ‘명맥바위’를 지나면 길은 곧 계곡과 능선으로 갈라진다. 왼쪽은 계곡, 오른쪽은 능선을 따라 걷는다. 어느 곳으로 가도 봉명폭포에 닿지만, 계곡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게 다소 수월하다. 숲은 활엽수 일색이다. 늦가을이면 불붙는 듯한 단풍을 선보이지 싶다.
들머리에서 봉명폭포까지는 30분 정도면 족하다. 천천히 걸어도 그렇다. 이끼 낀 작은 폭포 몇 개를 지나면 곧 봉명폭포다. 멀리서 거대한 암벽을 타고 폭포수가 쉼 없이 떨어져 내린다. 횡성에서 가장 큰 폭포라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다. 작은 숲이 숨겨둔 폭포치고는 제법 기골이 장대하다. 폭포 옆으로는 불퉁한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쳤다. 암벽 표면은 초록빛 이끼 일색이다. 봉명폭포를 달리 이끼폭포라 부르는 건 저 모습 때문일 터다. 폭포의 높이는 30m 정도다. 폭포수가 3단으로 굽이치며 쏟아져 내린다. 수량은 많지 않다. 가을철 갈수기에 접어든 탓이다. 하지만 폭포수의 소리는 더없이 청량하다. 크지도 작지도 않게 숲의 나뭇잎들을 흔든다. 누군들 봉황의 울음소리 들어봤으랴. 저마다 마음에 담아 두는 게 봉황의 소리일 터다.
이제 가을이 내려앉은 횡성의 옛길을 찾아나설 차례다. 대표적인 곳 중 하나가 옛 42번 국도다. 옛길은 백덕산 자락에 남아 있다. 백덕산은 횡성과 평창, 영월 등 3개 군에 걸쳐 있다. 높이는 1350m. 제법 큰 산이다. 가을 단풍과 겨울 설경으로 이름난 산이기도 하다. 능선 곳곳에 단애를 이룬 기암괴석과 단풍이 제법 잘 어우러진다.
가을걷이를 기다리는 횡성의 들녘.
옛 42번 국도는 한때 강릉과 서울을 잇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더 이전엔 ‘관동대로’라 불리기도 했다. 안흥은 둘 사이의 중간쯤에서 번성했다. 지금은 안흥의 명물이 된 찐빵 역시 당시엔 여행자와 인근 주민들이 즐겨 먹던 먹거리였을 터다. 그러다 1975년 영동고속도로가 뚫렸고, 새 길에서 나앉은 안흥도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걸었다.
옛 42번 국도는 숲 사이에 겨우 명맥만 남아 있다. 이 길을 따라 한때 시외버스가 평창까지 오갔다는 게 좀체 믿기지 않는다. 그 흔적이 평창과의 경계 지역 고갯마루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옛길 중간쯤에 ‘명품숲길’이 있다. 상찬의 표현이 아닌 실제 이름이 명품숲이다. 산림청이 솔숲 사이 능선을 따라 조성했다. 숲길은 얼추 8㎞ 거리다. 대개 평탄한 길이어서 걷기는 수월한 편이다. 전 구간을 도는 게 가장 좋지만 초입까지만 가도 소나무와 낙엽송이 어우러진 빼어난 풍경과 마주할 수 있다.
횡성 동북쪽의 병지방 계곡 임도도 가을 산책에 딱 좋다. 각종 낙엽활엽수와 낙엽송 우거진 숲길이 줄곧 이어진다. 무엇보다 적요해서 좋다. 여름철이면 제법 많은 피서객이 계곡을 찾지만 임도까지 들어오는 이는 드물다. 들머리에서 2㎞ 남짓 들어가면 나무 위에 ‘마음이 다한 곳 나!!’라는 이정표가 매달려 있다. 여기를 반환점 삼는 게 무난하다.
태기산의 해거름 풍경.
횡성에서 태기산(1261m)을 빼놓으면 손해다. 가을에는 더욱 그렇다. 일교차가 큰 가을 아침이면 태기산 주변으로 구름바다가 펼쳐진다. 넘실대는 구름을 뚫고 정상까지 솟구쳐 오르면 발아래로 강원의 산들이 섬처럼 떠 있다. 비 갠 오후라면 더 좋다. ‘인생 풍경’이라 할 만큼 멋진 해넘이 장면과 마주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좋은 건 오르기가 쉽다는 것이다. 국도 6호선 양두구미재에서 임도를 타면 정상까지 단박에 오를 수 있다. 거리는 약 4㎞다. 임도 곳곳에서 만나는 전망도 빼어나다.
태기산 주변으로 탐방로가 조성됐다. 올가을에 처음 선보인 길이다. 12.4㎞ 길이의 탐방로는 3개 구간으로 나뉜다. 풍력발전6호기에서 시작되는 1코스(2.5㎞) 청정자연체험 구간, 태기분교터에서 출발하는 2코스(4.5㎞) 역사문화체험 구간, 송덕사가 들머리인 3코스(6.9㎞) 자연명소 트레킹 구간 등이다. 구간마다 목재 데크를 깔아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데크 주변에 가을 야생화도 심었다.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촬영지.
물안개와 호수가 어우러진 수채화 같은 가을 풍경과 만나려면 포동교를 찾으면 된다. 횡성호를 따라 놓여진 여러 다리 가운데 하나다. 가을 아침이면 거의 예외 없이 다리 주변으로 물안개가 영근다. 호수를 에두른 소로를 따라 산책을 즐기기 좋다. 포동교 인근에 ‘망향의 동산’이 있다. 횡성댐 수몰민을 위해 조성된 공간이다. 횡성호 둘레길 가운데 가장 풍경이 빼어나다는 5구간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9세기 말께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중금삼층석탑 2기도 이곳에 있다.
한 곳만 더 덧붙이자. 청일면 고시리에 ‘님아 그 강을 건너지마오’(2014) 촬영지가 있다. 다큐멘터리로는 드물게 480만여명의 관객을 모은 영화다. 주인공은 무려 76년 동안 해로한 고 조병만 할아버지와 강계열 할머니다. 노부부는 어딜 가든 ‘커플룩’(한복)을 입었고, 두 손 꼭 잡고 다녔고, 앞서거나 뒤처지지 않으며 걷는 모습으로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촬영지 풍경은 수수하다. 아마, 사랑도 그럴 것이다.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33)
→가는 길:봉명폭포 들머리는 고라데이 마을(344-1004)이다. 이정표를 따르면 길 찾기는 어렵지 않다. 고라데이 마을에서 숙박 시설도 운영한다. 백덕산 옛 42번 국도는 상안리가 들머리다. 내비게이션에 횡성군 서동로상안10길이나 소나무낙엽송명품숲을 입력하면 찾을 수 있다. 옛 국도 주변으로 임도가 실핏줄처럼 나 있다. 주로 산악자전거 동호인들이 즐겨 찾는 산길이다. 사륜구동 차량이라면 도전해 볼 만하지만 임도가 워낙 길고 되돌릴 곳도 마땅하지 않은 만큼 초행자라면 옛 국도 주변만 편하게 돌아보길 권한다. 병지방 계곡 임도는 오토캠핑장 못 미처 시작된다. 이정표가 작아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임도가 매우 좁아 차는 주변에 세워 두는 게 좋다.
→맛집:횡성 하면 역시 한우다.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은 횡성축협에서 운영하는 축협한우프라자다. 횡성 읍내의 본점(343-9908)과 새말점(342-6680), 둔내점(345-8888) 등이 있다. 운동장해장국(345-1770)은 한우 해장국을 잘한다. 횡성종합운동장에 있다.
→축제:제11회 안흥찐빵축제가 13~15일 안흥면 안흥찐빵마을 일원에서 열린다. 찐빵을 주제로 안흥찐빵 주제관과 찐빵 만들기 체험, 찐빵 많이 먹기 대회 등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 놀거리를 준비했다. 안흥찐빵을 무료로 시식할 기회도 마련했다. 안흥찐빵은 막걸리로 발효해 차지고 구수하다. 특히 대부분 업소들이 여태 손으로 빚는 전통방식을 고수하고 있어 맛과 풍미가 깊다. 안흥찐빵축제위원회 340-2703.
2017-10-12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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