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큰 꽃축제인 네덜란드의 큐켄호프에서는 세계의 관상용 알뿌리식물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네덜란드의 국화이자 세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알뿌리식물인 튤립부터 이른 봄 피어나는 수선화와 크로커스, 꽃 장식에 많이 활용되는 아마릴리스와 나리까지. 땅속 비대한 뿌리를 상상할 수 없는 화려하고 다양한 색과 형태를 가진 꽃들을 보면서, 어쩐지 나의 머릿속 한쪽에서 우리나라의 상사화가 떠올랐다.
내가 일했던 국립수목원에는 상사화 밭이 있었다. 초봄까지는 땅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잠잠하다가 공기가 따뜻해지는 봄이면 연두색 잎새가 하나둘 솟아올랐다. 여러 개의 잎이 한군데에서 나와 사방으로 펼쳐지면 잎 색도 점점 진한 초록으로 변했다. 그즈음 다른 화려한 봄꽃들에 눈을 돌리다 상사화를 찾으면 잎은 이미 다 지고 사라졌다. 그리고 장마와 무더운 여름을 지내다 보면 어느새 잎이 났던 땅에서 기다란 녹색 꽃대가 올라오고 거기에서 여러 개의 진한 분홍색, 노란색 꽃망울을 짓다가 상사화는 꽃을 피웠다. 진한 분홍색 꽃은 상사화, 노란색 꽃은 진노랑상사화였다.
이들은 여느 식물들처럼 잎과 꽃이 함께 있는 걸 볼 수 없다. 잎이 진 후에 꽃이 피기 때문이다. 상사화라는 이름도 잎과 꽃이 영원히 만나지 못해 상사병이 걸린다 하여 지어졌다고 한다.
상사화는 ‘상사화’ 한 종을 일컫기도 하지만, 흔히 상사화속 식물 전부를 아우른다. 속명 리코리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여신, 리코리스 여신에서 유래했다. 이들은 우리나라와 일본, 대만, 중국 등 동아시아에 분포한다. 수목원의 상사화를 표본으로 만드느라 뿌리를 캐면 양파 같은 모양의 동그란 뿌리가 나온다. 수선화와 나리처럼 비대한 뿌리를 가진 알뿌리식물이기 때문이다. 다만 동아시아에 한정적으로 분포하고 다른 알뿌리식물들에 비해 최근에 발견됐기 때문에 널리 인간에게 이용되지는 못했다.
처음 이들이 세계에 알려지게 된 건 1897년, 일본에서 발견된 상사화가 유명 식물학 잡지인 ‘커티스’에 소개되면서부터다. 이때 상사화의 세밀화도 함께 기재됐는데, 재밌는 건 이 그림을 보고 유럽인들이 상사화라는 새로운 종이 아닌 기존 아마릴리스의 한 종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상사화의 영어 이름, 매직 릴리(Magic Lily)와 오텀 아마릴리스(Autumn Amaryllis)에서 알 수 있듯 이 둘은 친척(수선화과)인 만큼 형태도 닮은꼴이었다. 지난해 도쿄 자연사박물관에서 큐가든의 일본 식물 소장품 전시가 열렸을 때 이 상사화 그림 원본을 보았고, 그들이 왜 아마릴리스로 착각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일본은 후에 일본에서 자생하는 상사화속 식물들을 바탕으로 원예 품종들을 육성해 200종 이상의 품종을 만들어냈다. 실제로 우리가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상사화는 대부분 일본에서 육성하고 증식한 품종들이다. 대만에서는 이들이 새로운 경제작물로 대두되면서 재배면적을 늘려 40ha에 달하는 밭에서 상사화를 일군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붉은 석산 등 상사화속 식물을 재배하는 농가가 있다. 1990년대에는 우리나라에서 재배한 석산을 일본과 네덜란드로 수출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숲에는 도시에서 주로 보는 원예종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상사화속 식물들이 살고 있다. 그중 위도에서 처음 발견된 위도상사화, 샛노란색의 진노랑상사화, 붉노랑상사화, 전남 백양산에서 발견된 주황색 작은 꽃의 백양꽃, 그리고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제주상사화, 이 다섯 종은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한국특산식물이다. 이토록 아름답고 단아한 꽃 색과 형태를 자아내는 상사화 컬렉션이 우리 땅에서만 자생한다는 건 우리에게 참 행운이면서도 한편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상사화는 일본 식물로 알려져 있고, 우리나라에 사는 귀한 상사화의 존재를 아직 많은 이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수목원의 진노랑상사화를 관찰하면서 그림으로 그린 건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상사화가 새로운 자원식물로 여겨지면서 자생 상사화속 식물들을 꽃 장식용 절화나 실내 화분, 혹은 도로변이나 골프장의 정원식물로 활용하기 위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이들은 다른 알뿌리 식물들처럼 화장품이나 약의 원료가 될 수도 있다. 식물의 형태를 그리면서 머릿속으로는 이들의 미래 또한 함께 그려 본다.
구월 중순엔 전남 영광에서 상사화 축제도 열린다. 큐켄호프와 같진 않겠지만 우리 땅의 상사화가 주인공이 된다는 것, 그들을 보러 가는 사람들의 풍경과 인간의 식물 사랑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내게 큐켄호프 못지않은 설렘을 가져다준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상사화속 한국특산식물. 왼쪽부터 붉노랑상사화, 위도상사화, 백양꽃, 진노랑상사화, 제주상사화.
이들은 여느 식물들처럼 잎과 꽃이 함께 있는 걸 볼 수 없다. 잎이 진 후에 꽃이 피기 때문이다. 상사화라는 이름도 잎과 꽃이 영원히 만나지 못해 상사병이 걸린다 하여 지어졌다고 한다.
진노랑상사화 뿌리와 잎, 꽃의 형태.
처음 이들이 세계에 알려지게 된 건 1897년, 일본에서 발견된 상사화가 유명 식물학 잡지인 ‘커티스’에 소개되면서부터다. 이때 상사화의 세밀화도 함께 기재됐는데, 재밌는 건 이 그림을 보고 유럽인들이 상사화라는 새로운 종이 아닌 기존 아마릴리스의 한 종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상사화의 영어 이름, 매직 릴리(Magic Lily)와 오텀 아마릴리스(Autumn Amaryllis)에서 알 수 있듯 이 둘은 친척(수선화과)인 만큼 형태도 닮은꼴이었다. 지난해 도쿄 자연사박물관에서 큐가든의 일본 식물 소장품 전시가 열렸을 때 이 상사화 그림 원본을 보았고, 그들이 왜 아마릴리스로 착각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일본은 후에 일본에서 자생하는 상사화속 식물들을 바탕으로 원예 품종들을 육성해 200종 이상의 품종을 만들어냈다. 실제로 우리가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상사화는 대부분 일본에서 육성하고 증식한 품종들이다. 대만에서는 이들이 새로운 경제작물로 대두되면서 재배면적을 늘려 40ha에 달하는 밭에서 상사화를 일군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붉은 석산 등 상사화속 식물을 재배하는 농가가 있다. 1990년대에는 우리나라에서 재배한 석산을 일본과 네덜란드로 수출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숲에는 도시에서 주로 보는 원예종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상사화속 식물들이 살고 있다. 그중 위도에서 처음 발견된 위도상사화, 샛노란색의 진노랑상사화, 붉노랑상사화, 전남 백양산에서 발견된 주황색 작은 꽃의 백양꽃, 그리고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제주상사화, 이 다섯 종은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한국특산식물이다. 이토록 아름답고 단아한 꽃 색과 형태를 자아내는 상사화 컬렉션이 우리 땅에서만 자생한다는 건 우리에게 참 행운이면서도 한편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상사화는 일본 식물로 알려져 있고, 우리나라에 사는 귀한 상사화의 존재를 아직 많은 이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수목원의 진노랑상사화를 관찰하면서 그림으로 그린 건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이소영 식물세밀화가
구월 중순엔 전남 영광에서 상사화 축제도 열린다. 큐켄호프와 같진 않겠지만 우리 땅의 상사화가 주인공이 된다는 것, 그들을 보러 가는 사람들의 풍경과 인간의 식물 사랑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내게 큐켄호프 못지않은 설렘을 가져다준다.
2018-09-13 29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