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원

장남원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장남원의 도자 산책
  • [장남원의 도자 산책] 징더전 단상

    [장남원의 도자 산책] 징더전 단상

    중국 장시성 징더전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94년 1월이다. 상하이를 출발한 증기기관차는 11시간 남짓 달려 이튿날 오전에야 그곳에 도착했다. 더디고 추운 여정에 마주한 도시는 남루했고, 길은 진흙탕이었다. 명·청 시대 황실 도자기를 굽던 어요창(御窯廠) 터 주변 중심가에는 곧 쏟아져 내릴 듯한 검은 기와지붕의 공방과 판매점들이 어지럽게 뒤얽혀 있었다. 짚풀로 엮은 도자기 꾸러미들이 쌓인 좁은 길로 사람이 끄는 수레들이 오갔다. 온통 회색인 도시에서 도자기들만 겨우 천연색으로 기억될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징더전은 상하이에서 비행기로 1시간, 항저우 동역에서 고속열차로 2시간이면 다다를 수 있다. 왕복 열차에는 빈 자리가 없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내리고 탔다. 장시성 최대의 관광지로 부상한 도시에는 하루에 2만명 이상이 방문하는 ‘중국도자기박물관’이 있으며 어요창 유적지는 정비를 마치고 현장박물관으로 공개됐다. 게다가 그 출토 파편들은 ‘어요(御窯)박물원’의 모던한 전시로 인플루언서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새로 문을 연 ‘징더전 수출자기박물관’도, 50여년 역사를 지닌 징더전 도자대학의 현대식 새 캠퍼스도 인상적이었다. 시내 타오시촨(陶溪川) 공방지구는 리뉴얼
  • [장남원의 도자 산책] 꽃을 든 아이

    [장남원의 도자 산책] 꽃을 든 아이

    부드러운 비취빛 청자 발(鉢)의 내면에는 은은한 포도넝쿨 양각 문양이 가득 차 있다. 그 사이사이 3곳에는 어린아이들이 검고 가는 윤곽선에 백토를 메워 넣은 상감기법으로 새겨져 있다. 아이들은 살짝 미소 띤 얼굴로 이리저리 걷거나 뛰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 손에는 저마다 연과 새총, 꽃이 들려 있다. 800여년 전 도자기에는 왜 아이들이 그려졌을까. 국내외 연구들에 따르면 꽃 넝쿨을 짊어진 남자아이들은 이미 로마시대 석관에는 죽음을 애송하는 의미로, 고대 인도의 간다라 지역 스투파 부조에는 붓다에게 공양하는 의미로 장식됐다고 한다. 어린아이는 포도와 함께 묘사되기도 하여 중앙아시아, 중국 등을 거치면서 그림이나 공예품 등에 자주 등장한다. 어린아이 몸체만큼 크고 알알이 탐스러운 포도송이와 그 넝쿨 사이로 올라타고 재주 넘는 천진한 형상은 풍요로운 느낌으로 웃음 짓게 한다. 실제로 포도주가 애호됐던 현상과 연관 짓기도 한다. 현전하는 송나라 그림 속 아이들은 연못이나 정원에서 꽃을 따거나 물놀이를 하고, 새를 잡으러 다니거나 나뭇가지를 꺾어 뛰어가기도 하며, 때로는 공놀이를 하는 생활 장면 속에 그려졌다. 이 같은 도상들은 그대로 중국의 정요(定窯) 백자나 금
  • [장남원의 도자 산책] 파기

    [장남원의 도자 산책] 파기

    ‘파기’(破器)란 그릇을 깬다는 뜻이다. 독일 전통 가운데는 결혼식 본식 전 파티 때 하객들이 도자기 접시나 컵 같은 것들을 들고 와서는 신혼부부가 살 집 앞에서 깨는 ‘폴터 아벤트’(Polter abend)라는 풍습이 있다. 시끌벅적한 사람들과 그릇 깨지는 소리로 닥쳐올 액운을 물리치길 염원한다. 신랑신부는 산산 조각난 그릇을 치우며 어떤 역경도 함께 이겨 내겠노라 서원한다. 긍정의 파기다. 전통적으로 도자기를 만들던 요장(窯場)에서는 구워진 완제품에 대한 검수 단계에서 ‘파기’가 이루어진다. 중국 명나라(1368~1644) 때 강서성 경덕진(景德鎭) 주산(珠山)에 ‘어기창’(御器厰)이라는 제작소를 만들어 황제만을 위한 최고 수준의 도자기를 굽도록 했다. 상등품은 선별해 황실에 보냈는데, 이때 품질이 미치지 못하는 것들은 예비용으로 보관하거나 제작장 내에 구덩이를 파고 깨뜨려 묻었다. 기술과 조형의 보안을 위해 엄격히 관리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15세기 후반 임금의 수라와 궁궐 연회용 음식 공급 관련 업무를 담당했던 사옹원(司饔院) 부설로 음식용 백자 제작을 위한 도자기 제조장 ‘분원’이 경기 광주군에 설치됐다. 이 같은 체제는 조선 말까지 계속됐고,
  • [장남원의 도자 산책] 거란의 흔적

    [장남원의 도자 산책] 거란의 흔적

    고려 1117년(예종 12) 왕이 남경(南京ㆍ지금의 서울 부근)을 행차하던 중 귀화 거란인들의 거주촌을 지나게 됐는데 노래와 춤, 연극으로 왕의 행차를 맞이하니 왕은 수레를 멈추고 그것을 관람했다. 때는 고려가 거란(遼ㆍ907~1125)과의 3차 전쟁을 치른 후 화친을 회복하고, 단절됐던 송(宋ㆍ960~1279)과의 외교관계도 복구한 참이었다. 1123년 북송 황제 사절단이 기록한 ‘고려도경’(高麗圖經)도 수많은 거란 포로들 가운데 기술자들이 많았고, 그들 가운데 뛰어난 사람을 개경에 머물게 하면서 고려의 기물과 복식이 정교해졌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 스타일이 부화스럽고 허세가 많아 질박한 과거로 되돌릴 수 없다고 했다. 거란의 장인과 기예가 고려에 합류하면서 변화가 일었고, 그 문물과 풍조가 상당히 만연했음을 보여 준다. 요나라가 망한 후 고려는 금(金ㆍ1115~1234)과의 실질적 관계 개선에 주력했고, 남송과도 우의를 지키고 있었으나 조정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앞다투어 거란의 화려한 기풍을 따르고 있었다. 1129년(인종 7) 왕이 탄식의 조서를 발표할 정도였으니 여운이 만만치 않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2000년대 초 공개된 하북성
  • [장남원의 도자 산책] 작고 소박한 것에 깃들인 용/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장남원의 도자 산책] 작고 소박한 것에 깃들인 용/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용의 해다. 부리부리한 눈과 상서로운 사슴뿔에 휘날리는 갈기를 가진 용들을 본다. 이미지와 텍스트로 된 동아시아의 고전들로부터 온갖 아름다운 용들이 소환되고 있는 즈음이다. 특히 푸른빛을 발하는 청룡은 좋은 기운을 몰고 올 것이라고 믿기에 생동하듯 꿈틀거리는 비늘로 뒤덮인 몸체와 신비롭고 날카로운 발톱을 세운 그 용맹한 모습을 떠올리며 우리는 상상하고 선망한다. 꿈에서라도 용을 한 번 볼 수 있기를. 그 용이 내 품에 안기기를. 그런데 우리 중 누구도 용을 실제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수천 년간 만들어져 온 그 형상은 인간 세상에서 권위의 정상을 드러내는 대표적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왕이나 황제의 권력을 대변했고, 그 명령을 수행하는 군대의 깃발과 지존이 앉는 의자, 거하는 공간의 천장과 기둥, 복식과 각종 기물에 이르기까지 왕조의 규정에 따라 근엄하고 웅장하게 구현됐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 보통의 삶 속에서 용은 이리저리 불려 다니곤 한다. 미꾸라지처럼 외모가 별로였던 친구가 준수한 모습으로 나타나면 ‘용 됐다’ 하고 의지나 열정이 끓어오르는 기세를 ‘용솟음친다’고 한다. 들판이나 망망대해에서 거칠 것 없이 회오리쳐 오르는 기상현상을 보면 ‘용오름
  • [장남원의 도자 산책] ‘아르누보’가 된 배추/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장남원의 도자 산책] ‘아르누보’가 된 배추/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천지가 붉고 노랗게 물들다 급기야 그 잎마저 떨구는 계절이 되면 한 해는 눈 소식과 함께 김장으로 마무리된다. 그래서 연중 마지막까지 푸르고 싱싱한 자태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배추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다산시문집’(권 14)에서 배추의 본명이 ‘숭채’(菘菜)라 밝히고, 중국에서는 ‘백채’(白菜)라 하는데 ‘배초’(拜草)는 그 방언이라 했다. 몇 년 전 경복궁의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서 초록이 짙은 배춧잎 무늬 항아리를 본 적이 있다. 유래인즉 창덕궁에서 사용했던 유물이었다. 공처럼 둥근 항아리의 몸체 전면에 싱싱하고 넓게 펼쳐진 배춧잎은 잎맥까지 세밀했다. 그 위의 나비와 풀벌레는 화려하게 채색됐다. 뚜껑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무엇인가 담아서 보존하는 용도였을 것이다. 배추 무늬를 넣은 각종 식기와 장식용 화병 등은 19세기 말 중국 경덕진이 해외 수출용으로 만든 것으로 유럽과 미국, 동남아 등지로 팔려 나갔다. 당시 유럽에는 이른바 ‘아르누보’라는 예술사조가 등장해 꽃이나 식물 줄기를 모티브로 한 디자인이 건축 외관과 실내장식, 각종 공예품부터 벽지에 이르기까지 도처에 적용되면서 대유행을 이루고 있었다. 아르누보풍으로 디자인된 배추문 도
  • [장남원의 도자 산책] 어느 외교관의 초대/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장남원의 도자 산책] 어느 외교관의 초대/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화면 중앙 기다란 식탁을 중심으로 갓을 쓴 조선 남자들과 서양인, 중국인 등이 섞여 앉아 있다. 조선의 전통 연회에서 꽃을 꽂은 화준(花罇)이 별도의 공간에 놓이던 것과 비교하면 커다란 도자기 화병이 식탁 위에 올라선 것은 유럽식이다. 각자의 앞에는 크고 작은 유리잔들이 놓여 여러 종류의 술도 준비됐음을 알 수 있다. 때는 1887년. 외부독판(外部督辦ㆍ외무장관) 조병식(趙秉式ㆍ1823 ~1907)은 조선에 주재하던 서구의 외교 인사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기생들도 불러 흥을 돋웠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서양식 오찬이 열렸다. 양식기들 사이로 포크와 나이프들이 분주해 보인다. 조선 사람들은 젓가락을 사용하고 있다. 이 장면은 1887년부터 1889년까지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으로 근무했던 샤이에 롱(1842 ~1917)이 촬영했고, 훗날 해외 주재 외교관의 활동을 소개하는 기고문과 함께 1894년 8월 프랑스 주간지 릴뤼스트라시옹과 9월 1일자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에 실렸다. 이날의 메뉴에 대해 롱은 고기를 술에 너무 절여서 맛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고 했다. 하긴 조선 왕실에서 서양 요리로 외국인을 처음으로 접대한 것이 1884년경이므로 갑자
  • [장남원의 도자 산책] 전쟁과 도자기/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장남원의 도자 산책] 전쟁과 도자기/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전쟁으로 피란을 떠나게 되면 가장 먼저 두고 가는 물건은 도자기일 것이다. 무겁고 깨지기 쉬운 특성 때문이다. 중국 내몽골 집녕로(集寧路)의 유적지에서 14세기 말 홍건적이 침입하고 진압 전투가 벌어지자 주민들이 피란하면서 도자기나 금속기 등을 묻어 두었던 구덩이가 수십 개 발굴된 적이 있다. 또 임진왜란부터 정묘호란까지 연이은 전쟁으로 기력이 쇠했던 17세기 조선 왕실에서 공식 행사나 외교 접대에 사용할 제대로 된 용무늬 항아리[龍罇]를 구하지 못해 임시방편으로 무늬 없는 백자에 그림을 덧그려 사용하면서 구차한 현실을 한탄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전쟁이 길어지면 도토(陶土)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제작 장인들도 흩어져 요업은 중단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으로 도자기 생산이 활황을 누린 경우도 있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점령한 뒤 1931년 만주국 건설 이후 태평양까지 전선을 확대하면서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했다. 식량은 물론 군수품 조달을 위해 금속류를 거두기 시작하면서 각 가정에서 사용하던 ‘유기(鍮器) 공출(供出)’이 본격화됐다. 구리로 만든 문화재나 주택의 대문은 물론 숟가락부터 제사 용기들에 이르기까지 잠수함과 비행기ㆍ총포 등을 만드는
  • [장남원의 도자 산책] 푸른 도자기 베개속 아름다운 꿈/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장남원의 도자 산책] 푸른 도자기 베개속 아름다운 꿈/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푸른 도자기 쪼아 만든 베개 물보다 맑아(綠瓷琢枕澄於水), 만져 보니 옥같이 매끄럽고 부드럽네(入手如捫玉肌膩), 그 속으로 들어가지 말라 했는데 뛰어들고 말았으니(跳身愼勿入其裏), 뒤숭숭한 황량몽 같은 꿈이었던들(擾擾黃粱夢中事), 한단 노생에게 부끄러울 것 있으랴(邯鄲靑駒何必恥)”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실린 고려시대 이규보(1168~1241)의 ‘녹자침’(綠瓷枕)이다. ‘녹자’란 고려청자다. 아름답게 조각된 청자 베개를 만져 보다가 잠든 이규보는 꿈까지 꾸었다. 비몽사몽간에 깨어 보니 당나라(618~907) 때 문인 심기제(750~800)의 ‘침중기’(枕中記) 이야기가 떠오른 것이다. 심기제의 ‘베개속 이야기’에서 노생(盧生)은 하북성 한단(邯鄲)의 어느 여관에서 여옹(呂翁)이라는 도인을 만났다. 그에게 자신의 미천하고 궁색한 처지를 털어놓았더니 그는 베개를 주면서 잠을 권했고, 이내 잠들었더니 부귀영화에다 자식도 낳고 노년까지 장수하는 길고 행복한 꿈을 꾸게 된다. 하지만 홀연히 깨어나 보니 잠들기 전 여관 주인이 짓고 있던 좁쌀밥이 아직도 끓고 있었다. 너무나 짧은 순간이었다. 허황한 꿈이란 얼마나 무상한 것인지…. 그런데 대체 이규보는 어디
  • [장남원의 도자 산책] ‘판판한’ 식기, 그리고 허세/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장남원의 도자 산책] ‘판판한’ 식기, 그리고 허세/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부르주아는 판판한 식기를 가지고 싶어 한다. (중략) 그가 판판한 식기를 갖게 된 날 오랫동안 만나지 않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자기가 훌륭한 식기를 구했다고 알리고, 조촐하지만 저녁을 함께 먹자고 초대한다.” 파리에서 태어나 글로 명성이 자자했던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1740~1814)가 18세기 후반 파리를 관찰하며 기록한 ‘파리의 풍경’의 한 대목이다. ‘판판한 식기’는 아마도 메인 요리를 담을 수 있는 넓고 납작한 도자기 접시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들은 왕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의 그릇에 가문의 문장(紋章)을 넣어 과시하는 데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마치 저녁식사의 초대 이유가 그릇과 도자기를 자랑하고 싶어서이기라도 하듯. 파리만의 현상이었을까. 이미 17세기 이후 유럽 각국에서는 동서양 해상무역의 발달로 중국이나 일본 도자기의 유입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수집 열풍이 일었다. 건물 실내의 장식으로 쓰였고 곳곳에 ‘도자기의 방’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또 1710년 독일 마이센이나 1756년 이후 프랑스 세브르 등지에서는 고령토를 활용하면서 오랫동안 선망했던 동양의 도자기에서나 가능했던 희고 단단한 백자의 생산이 가능해졌다. 그러니 왕실이나 귀족의
  • [장남원의 도자 산책] 얼음장 갈라 터진 ‘빙렬’ 무늬 백자/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장남원의 도자 산책] 얼음장 갈라 터진 ‘빙렬’ 무늬 백자/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1777년 북학파의 한 사람이었던 유금(1741~1788)은 이덕무·유득공·박제가·이서구 등 저명한 시인들의 작품을 모은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을 펴냈다. 이 가운데 당시 화가이자 서화고동(書畫古董)의 감식가로 유명했던 서상수(1735~ 1793) 집에 초대받아 갔던 어느 비 내리는 가을밤 정경을 묘사한 이덕무의 시가 한 수 남아 있다. 서상수가 벗들을 위해 향을 피우고 차를 대접하는 자리에는 문인들이 좋아할 만한 고상하고 우아한 물건들도 차려졌다. 그중 비취새 깃털이 꽂혀 있던 ‘얼음무늬 작은 항아리’는 이덕무의 마음에 남았다. 술이 무르익어 모임은 파했지만, 그는 그날의 잔영을 다른 시에서 ‘얼음무늬 있는 그릇만이 기억할 것’이라고 떠올렸다. 금이 간 빙렬(氷裂) 무늬 도자기는 ‘가요’(哥窯)라고 부른다. 본래 중국 송나라 때 청자를 굽고 냉각하는 과정에서 몸체를 만든 흙과 덧입힌 유약층의 수축팽창 계수가 달라 표면에 우연히 균열이 생긴 데서 비롯됐다. 그런데 이 갈라지고 터진 틈으로 세월의 때가 앉으면서 마치 무늬처럼 자리잡았고, 연륜과 관록을 가진 것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빈티지한 이 그릇들은 애장품이자 화병으로도 인기를 끌어 중국 명ㆍ청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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