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원의 도자 산책] 거란의 흔적
고려 1117년(예종 12) 왕이 남경(南京ㆍ지금의 서울 부근)을 행차하던 중 귀화 거란인들의 거주촌을 지나게 됐는데 노래와 춤, 연극으로 왕의 행차를 맞이하니 왕은 수레를 멈추고 그것을 관람했다. 때는 고려가 거란(遼ㆍ907~1125)과의 3차 전쟁을 치른 후 화친을 회복하고, 단절됐던 송(宋ㆍ960~1279)과의 외교관계도 복구한 참이었다.
1123년 북송 황제 사절단이 기록한 ‘고려도경’(高麗圖經)도 수많은 거란 포로들 가운데 기술자들이 많았고, 그들 가운데 뛰어난 사람을 개경에 머물게 하면서 고려의 기물과 복식이 정교해졌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 스타일이 부화스럽고 허세가 많아 질박한 과거로 되돌릴 수 없다고 했다.
거란의 장인과 기예가 고려에 합류하면서 변화가 일었고, 그 문물과 풍조가 상당히 만연했음을 보여 준다. 요나라가 망한 후 고려는 금(金ㆍ1115~1234)과의 실질적 관계 개선에 주력했고, 남송과도 우의를 지키고 있었으나 조정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앞다투어 거란의 화려한 기풍을 따르고 있었다. 1129년(인종 7) 왕이 탄식의 조서를 발표할 정도였으니 여운이 만만치 않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2000년대 초 공개된 하북성